[외교비사㉞] 北, 수교에 '비핵화·평화' 활용하나…정부 촉각
  • 김정수 기자
  • 입력: 2025.03.30 00:00 / 수정: 2025.03.30 00:00
IAEA 사찰·남북기본합의서로 '외교전'
정부, 7.7 선언 존중…우방과 조율 나서
北, UN 사령부 철수 주장…진정성 의문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91~1992년 북한이 남북 유엔(UN) 동시 가입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수용, 남북기본합의서 등을 통해 외교 지평 확대를 모색하고자 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노태우 정부는 북한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서도 비핵화와 평화 무드가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숨기지 않았다. /임영무 기자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91~1992년 북한이 남북 유엔(UN) 동시 가입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수용, 남북기본합의서 등을 통해 외교 지평 확대를 모색하고자 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노태우 정부는 북한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서도 비핵화와 평화 무드가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숨기지 않았다. /임영무 기자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북한은 1991년 9월 17일 남북 유엔(UN) 동시 가입과 1992년 1월 30일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전조치 협정 서명을 바탕으로 미수교국과의 수교를 본격 추진했다. 1992년 2월 19일 남북기본합의서(남북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발효 등 남북 관계 진전도 명분이 됐다.

당시 북한은 소련 해체에 따라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방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었다. 김일성이 소련 해체 직전 중국을 직접 방문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북한으로서는 국제적 고립뿐 아니라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이 시급했던 때였다. 이에 비핵화와 남북 화해 무드를 활용, 외교 지평 확대를 적극 모색한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겉으론 북한의 수교 활동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앞서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7.7 선언(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에 따라 '북한과 우방국 간 관계 개선에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었다. 정부는 또 이 선언 6항 '북한이 미국, 일본 등과 관계 개선하는 데 협조하고 우리는 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를 개선한다'에 입각하기로 했다.

다만 정부로선 안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북한이 핵 사찰과 남북 관계 진전에 긍정적 입장을 보였더라도 이는 '수교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수 있었다. 이에 정부는 우방국에 몇 가지를 당부하기로 했다. 북한이 접근한다면 △완전한 핵 사찰 수락 △남북 진전의 실질적 활동 등을 수교의 전제로 말해달라 요청한 것이다.

외무부가 작성한 북한 수교에 대한 미수교국 입장. 대부분 국가는 핵 사찰 등을 전제로 내걸었지만 실제로 수교를 맺은 국가도 있었다. 1992년 9월 25일 칠레는 정부에 사전 언급 없이 북한과의 수교를 재개했다. /외교부
외무부가 작성한 북한 수교에 대한 미수교국 입장. 대부분 국가는 핵 사찰 등을 전제로 내걸었지만 실제로 수교를 맺은 국가도 있었다. 1992년 9월 25일 칠레는 정부에 사전 언급 없이 북한과의 수교를 재개했다. /외교부

구체적으로 외무부(외교부)는 '우방국과 북한의 관계 개선 여부를 우리의 주도적 대응하에 추진한다'는 내용의 지침을 마련했다. 이어 북한의 대외 활동을 개방·개혁의 계기로 활용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또 우방국에는 △IAEA의 완벽한 사찰 △남북 핵통제공동위원회 사찰 △비핵화 공동선언의 성실한 이행 △이산가족 왕래 및 경제 교류 등 북한 수교의 전제 조건을 세분화하기로 했다.

미국, 일본, 유럽공동체(EC: 현재 EU 전신), 호주 등은 이에 동의했다. 이들은 북한과 수교에 있어 '기본적으로 북한의 핵 사찰 수락과 남북 관계의 의미 있는 진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다만 모든 국가의 입장이 이와 동일하지 않았다. 실제로 제3세계 국가였던 필리핀, 브라질, 우루과이 등 일부는 대북 수교를 검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북한은 김영남 외교부장을 내세워 미수교국 접촉을 시도했다. 김 부장은 '비동맹 정상회의'에서 브루나이, 쿠웨이트, 뉴질랜드, 칠레, 스페인 외무장관 등 5개 미수교국을 포함한 27개국 대표와 접촉했다. 김 부장은 또 UN 총회 참석을 계기로 17개국 외무장관을 만났다. 실제로 1992년 9월 25일 북한은 칠레와 수교 재개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상옥 외무부 장관은 재외공관장 회의를 통해 "북한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북한은 내외적으로 변화 요인을 안고 있어 변화는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된다"면서도 "다만 계속적인 경계와 신중한 관찰과 분석, 대처는 필요하다"고 밝혔다.

특히 이 장관은 "주요 지침 2가지를 내리겠다. 핵 문제와 관련해 북한이 IAEA 핵 사찰과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 의거한 남북 간 상호 핵 사찰을 수용해 이제는 국제사회 우려를 불식하는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며 "남북 대화의 의미 있는 진전은 향후 실천에서 보여질 것이고, 우리의 우방국과 북한 수교는 이를 기본 입장으로 대응하라"고 주문했다.

외무부는 북한이 남북기본합의서와 IAEA 사찰을 이유로 수교 교섭을 강화하던 중 돌연 주한 유엔군 사령부의 철수를 주장했다고 밝혔다. /외교부
외무부는 북한이 남북기본합의서와 IAEA 사찰을 이유로 수교 교섭을 강화하던 중 돌연 주한 유엔군 사령부의 철수를 주장했다고 밝혔다. /외교부

공교롭게도 정부의 '혹시 모른다'는 우려는 곧 현실로 다가왔다. 북한은 돌연 비핵화 분위기와 남북 관계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며 "주한 유엔군 사령부의 존속은 타당성을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완벽한 수준의 핵 사찰이나 남북기본합의서의 후속 조치는 전혀 이뤄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실제로 북한은 IAEA 사찰 수락 의사를 밝히면서도 남북 공동 핵 사찰은 언급을 피했다. 당시 IAEA 사찰은 북한이 임의로 신고한 핵 물질과 시설만 둘러볼 수 있는 제한적 수준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 합의한 화해, 군사, 경제, 사회문화 교류 등 4개 공동위원회 구성도 진척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유엔군 사령부 소속 관련 국가에 군사 요원의 철수를 요청하는 등 서서히 '선을 넘는' 행동을 보였다. 북한의 이같은 움직임에 미국도 경계수위를 높였다. 미 국무부는 모든 재외공관에 "북한이 IAEA 사찰 및 남북 상호 사찰을 성실히 수용해야 관계 개선이 가능하다"고 지시했다.

하지만 북한은 IAEA 핵안전조치 협정 서명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약 1년 뒤인 1993년 3월 12일,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를 전격 선언했다. 국제 정세는 격랑으로 빠져들었고 이후 북한은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js8814@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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