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1983년 7월 2일 주오트볼타(부르키나파소) 대사관 측은 평소 알고 지내던 오트볼타 대학생 A에게서 놀라운 사실을 전해 들었다. 내용에 따르면 A는 방학 기간에 맞춰 지인 B와 아이보리코스트(코트디부아르)의 아비쟝(아비장)으로 여행을 갔다. 여행 중 A는 B로부터 어느 단체의 가입을 권유받았다. A는 어떤 단체냐고 물었지만 B는 말끝을 흐릴 뿐이었다.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던 A는 B를 따라 해당 단체의 모임에 참석해 보기로 했다.
모임은 언뜻 보기에 특별할 게 없었다. 참석자는 모두 32명으로 이들의 국적은 인도, 리비아, 말리, 아이보리코스트, 세네갈 등이었다. 곧 인도와 리비아 국적 회원의 주도로 회의가 시작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A는 두 귀를 의심하게 됐다. 이날 단체가 모인 목적은 다름 아닌 '한국 내 첩보활동'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A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자칫 손사래를 치며 자리를 떴다간 화를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의는 약 2시간 동안 이어졌다. 이후 한국에 잠입할 요원으로 인도 국적의 C가 결정됐다. C의 임무는 이달 중 한국에 입국해 고리·월성 원자력 발전소 시설과 동두천 미군 기지를 촬영하고 돌아오는 일이었다. 당시 회의에서는 한국 지도와 고리, 월성, 동두천 인근 상세 지도까지 펼쳐졌다. C는 임무 수행을 위해 회의 종료 뒤 곧바로 아비쟝을 떠났다. A에 대한 단체 가입 여부도 안건으로 상정됐다. A는 얼버무렸지만 참석자들은 A를 동지로 간주했다.
이같은 첩보 내용을 전달받은 정부는 해당 단체를 친북 단체로 의심했다. 이들의 한국 잠입 작전이 3개월 뒤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의회연맹(IPU) 총회를 방해 하기 위한 북한의 의도와 연결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며칠 뒤, 주오트볼타 대사관 측은 A와 다시 접촉했다. A는 단체 활동을 지속하며 파악한 정보를 풀어놨다. A에 따르면 인도 회원 C는 아직 인도 봄베이(뭄바이)에 머물고 있었다. C의 한국 입국 시기는 7월 13일 이후로 파악됐다. A는 단체와 북한과의 연결고리도 포착해 냈다. 단체가 보유하고 있던 문서철에 김일성 배지를 비롯해 김일성과 카다피가 나란히 찍은 사진이 있었던 것이다. A는 "회합은 아비쟝 15㎞ 교외에서 주로 야간에 열린다"며 "이 단체가 친공 비밀단체라는 데 확신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후에도 A는 단체 활동을 멈추지 않고 관련 정보를 우리 정부에 제공했다. A는 한국에 잠입할 C가 머물 곳은 조선호텔이자 사서함 번호는 CPO BOX 3706, 테렉스(텔렉스·Telex) 번호는 K24256이라고 전했다. A는 C 외에도 여러 요원이 한국에 입국할 가능성이 있다고도 귀띔했다. 주어진 임무 역시 원자력 발전소와 미군기지뿐 아니라 2개 화력발전소 시설까지 촬영하는 것으로 확대됐다고 했다. A는 또 C를 몰래 촬영하는 데 성공, 사진을 오트볼타 대사관 측에 전달했다.
A는 단체 관계자의 비밀 서류철에서 6명의 한국인 사진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 중 2명의 사진을 촬영했고, 이들의 인적 사항을 기록했다. 실제로 이들은 1983년 3월 11일 간첩 혐의로 검거돼 수감 중인 인물들이었다.
A가 우리 정부에 전달한 대로 C는 7월 22일 한국에 입국해 조선호텔에 머물렀다. 사서함 번호 역시 CPO BOX 3706으로 일치했다. 정부는 C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C가 고리 원자력 발전소 등에서 임무를 마치는 대로 덮칠 기세였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C는 26일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이에 A는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는 건 시간 문제라고 토로했다. 정부는 A를 구슬리며 단체 활동을 계속해달라고 요청했다. A가 캐낸 정보들이 사실에 부합하는 만큼, 정부로서도 이대로 멈추긴 어려웠다. 하지만 신변의 위협을 느낀 A는 즉각 단체를 탈퇴해 버렸다. 정부도 A의 신변을 보장해 주기 어려운 만큼 그의 결정을 막지 않았다. A는 이후 해외 어딘가로 떠나버렸다.
A와 꾸준히 접촉했던 주오트볼타 대사관은 1983년 10월 5일 '국제적 친공 조직에 대한 대책'이라는 보고서를 끝으로 관련 활동을 종료했다. 주오트볼타 대사관은 외무부에 "그간 정황에 비춰 친공 비밀 단체가 아비쟝에 존재하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며 "해당 단체가 아이보리코스트 정부에도 위해로운 단체인 것으로 분석된다"고 보고했다. 이어 "A가 조직 탈퇴 결심을 굳히고 해외로 출국했다"며 "당관 활동에는 물리적인 제약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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