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비사㉙] 사형 선고 '국제 간첩'…24년 뒤 日서 등장?
  • 김정수 기자
  • 입력: 2025.02.23 00:00 / 수정: 2025.02.23 00:00
밀항 시도 중 체포, 北에 보낼 편지 찢어
'국제 스파이 혐의' 사형 판결 전력 확인
이후 행적 묘연...외교 전문도 송환까지만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79년 7월 21일 국제 간첩 혐의로 한국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던 A가 24년 만에 나타난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A는 일본에서 밀항 중 붙잡혔고 북한에 보내려던 편지를 체포 도중 찢어버린 것으로 파악됐다. A는 한국으로 즉각 송환됐지만 외교 전문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아 이후 행적은 묘연하다. /임영무 기자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79년 7월 21일 국제 간첩 혐의로 한국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던 A가 24년 만에 나타난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A는 일본에서 밀항 중 붙잡혔고 북한에 보내려던 편지를 체포 도중 찢어버린 것으로 파악됐다. A는 한국으로 즉각 송환됐지만 외교 전문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아 이후 행적은 묘연하다. /임영무 기자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 | 김정수 기자] 1979년 7월 21일 자정에 가까운 늦은 저녁, 주일 한국 대사관은 일본 법무성 경비과장으로부터 '한국인 밀항자 송환에 협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일본 측이 건넨 밀항자 신상 정보에는 A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24년 전 '국제 간첩 혐의'로 한국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인물이었다.

당시 A는 일신해운이라는 소속 선박에 몸을 싣고 밀항하려다 일본 당국에 적발됐다. A를 포함해 밀항을 시도한 인원은 모두 5명이었다. 이 중 4명은 국적이 확인돼 각자의 본국으로 송환됐다. A 역시 1950년 일본에 '특별재류'를 허가받은 한국인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A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A는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나는 홍콩에서 태어난 중국 사람"이라며 "서울 성북구에 있는 중국집 '성북 반점'에서 일했지만 한국 사람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일본 측은 A가 왜 이렇게까지 자신의 국적을 숨기려는지 의아해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당국은 그가 한국에서 반공법 위반 혐의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A는 1954년 비율빈(필리핀) 수도 마니라(마닐라)에서 열린 SEATO(동남아시아방위조약기구) 회의를 앞두고 현지 수사 당국에 의해 국제 간첩 혐의로 체포된 바 있었다. 비율빈 수사 당국은 A가 '공산 측의 간첩으로 불법 입국한 것'이라고 단정 짓고, 한국 외무부(외교부)에 그를 인계하라고 통보했다. 이에 내무부 치안국은 A를 연행해 입국 즉시 그를 긴급 구속했다.

주일 한국 대사관은 일본 당국으로부터 입수한 A의 진술 등을 종합해 외무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이후 한국 정부는 이틀도 되지 않아 A에 대한 국내 송환 조치를 단행했다. /외교부
주일 한국 대사관은 일본 당국으로부터 입수한 A의 진술 등을 종합해 외무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이후 한국 정부는 이틀도 되지 않아 A에 대한 국내 송환 조치를 단행했다. /외교부

A가 비율빈에서 붙잡힌 사유는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A는 비율비에서 SEATO 회의록을 입수하고, 홍콩에서 국제공산당 자금에 충당할 미화 10만달러를 가져오라는 명령을 하달받았다. 이후 마니라에 체류하며 관련 계획을 준비 중이었다가 수사 당국에 체포된 것이다. A는 비율빈에 입국하기 위해 지인의 여권을 절취, 서명과 사진을 변조한 위조 여권을 사용한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A는 6·25 전쟁이 발발한 해 12월 일본으로 밀항했다. 이후 국제공산당에 가입해 1년간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일본에서 자리를 잡고 한국 학생의 동태를 살피는 동시에 미군 비밀서류를 암호 삼아 북한 측과 연락한 것으로 드러났다. A는 관련 혐의에 따라 1955년 11월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주일 한국 대사관은 이같은 행적을 지닌 A가 일본에서 붙잡힌 사실을 외무부 본부에 전달했다. 내용을 파악한 정부는 즉시 A의 국내 송환을 지시했다. A가 일본에서 부산행 비행기에 오른 시간은 1979년 7월 23일 오후 6시. 주일 한국 대사관이 A 사건을 최초 인지한 지 이틀도 되지 않은 때였다.

정부로서는 A의 추가 반공법 위반 혐의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A는 일본 당국에 체포됐을 당시 갖고 있던 편지를 돌연 찢어버린 것으로 파악됐다. 해당 편지의 수신처는 북한으로 돼 있었다. A의 또 다른 간첩 혐의가 수십 년 만에 포착될 수 있는 대목이었던 셈이다.

다만 A와 관련된 외교 전문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다. 외무부의 역할은 A의 밀항을 보고받고 한국 송환을 지원하는 데 그쳤다. A와 관련된 언론 보도 역시 과거 사건 이후로는 작성되지 않았다.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뒤 24년 만에 나타난 A. 그는 결국 어떻게 됐을까.

js8814@tf.co.kr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이메일: jebo@tf.co.kr
· 뉴스 홈페이지: https://talk.tf.co.kr/bbs/report/write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