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나우히어] 송대관과 '비상계엄', 50년 흘러 다시 부르는 ‘해뜰날’
  • 박종권 언론인
  • 입력: 2025.02.12 00:00 / 수정: 2025.02.12 00:00
군사독재와 10월유신의 엄혹한 시대에 희망의 노래로 태어난 송대관의 ‘해 뜰 날’은 1980년 군사쿠데타로 좌절된 ‘서울의 봄’을 거쳐 1987년의 ‘6월 항쟁’을 통해 마침내 ‘해 뜬 날’을 이뤄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얼어붙은 한국 사회에 50년 전에도 그랬지만 머지않아 ‘해뜰날’이 틀림없이 다시 올 것이다./국회=박헌우 기자
군사독재와 10월유신의 엄혹한 시대에 희망의 노래로 태어난 송대관의 ‘해 뜰 날’은 1980년 군사쿠데타로 좌절된 ‘서울의 봄’을 거쳐 1987년의 ‘6월 항쟁’을 통해 마침내 ‘해 뜬 날’을 이뤄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얼어붙은 한국 사회에 50년 전에도 그랬지만 머지않아 ‘해뜰날’이 틀림없이 다시 올 것이다./국회=박헌우 기자

[더팩트 | 박종권 언론인] 정확히 50년 전이다. 1975년 겨울은 요즘보다 더 추웠다. 2년 전부터 시작된 중동 석유파동의 여파 때문이다. 수입물가가 뛰어오르면서 경제도 구들장도 얼어붙었다. 1973년 물가상승률이 3.2%였는데 1974~75년에는 25%대를 기록했다.

74년에는 전국 중고교의 수학여행도 중단됐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인가. 좋지 않은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는 말이다. 오일쇼크로 비롯된 경제난에 정치적으로는 유신독재까지 이어지면서 사회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때 라디오 전파를 타고 노래 하나가 흘러나왔다. 바로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가 답답한 가슴에 한 줄기 햇살을 던졌다. 가수 송대관의 ‘해 뜰 날’이다. 비바람 불고 눈보라 몰아치는 날이 계속돼도 언젠가는 맑은 하늘에 쨍하고 해가 뜰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을 담은 노래이다.

뛰고 뛰고 뛰는 몸이라 괴롭지만 힘겨운 나의 인생 구름 걷히고 산뜻하게 맑은 날 돌아온다는 거다. 그야말로 쨍하고 해 뜨는 날이 온다는 거다. 무명생활을 오래 견뎌온 송 씨가 직접 쓴 자전적 가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구름이 잔뜩 끼어 흐린 인생에서도 "(노력)하면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는데 때마침 사회적 집단 우울증에 빠진 시민들을 다독이는 치유의 노래가 됐다.

지난 7일 별세한 송대관은 1970년대 후반 오랜 무명생활을 거친 자전적 노래 해 뜰 날로 구름이 잔뜩 끼어 흐린 인생에서도 (노력)하면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 사랑을 받았다./더팩트 DB
지난 7일 별세한 송대관은 1970년대 후반 오랜 무명생활을 거친 자전적 노래 '해 뜰 날'로 구름이 잔뜩 끼어 흐린 인생에서도 "(노력)하면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 사랑을 받았다./더팩트 DB

제목은 ‘해 뜰 날’이지만 더러는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노래도 "쨍하고 볕들 날~"로 부르는 이가 많았다. 날씨야 구름이 끼었다가 걷히기도 하지만 쥐구멍에 갇힌 사회적 소외계층에게는 날씨 타령할 여유도 없다. 그저 좁은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손톱만한 햇볕일 망정 고대하고 있는 거다.

송 씨의 인생은 노래 제목처럼 곧바로 구름 걷히고 해가 떴다. 1975년 말 발표한 노래인데 해가 바뀌어도 가요프로그램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해 연말해는 올해의 가수상도 받았다. 이후 트로트의 황태자로 가수 태진아와 쌍벽을 이루며 대체로 탄탄대로 인생길을 걸었다.

그의 모교는 주간과 야간으로 이뤄진 전주 Y고교이다. 이 학교가 고교평준화로 일반 고교가 됐지만 추첨으로 배정받은 학생들은 불만스러웠다. 학교 측은 학부모들에게 홍보물을 발송했는데 자랑스런 동문으로 송대관과 ‘사랑의 미로’를 부른 가수 최진희를 소개했다. 학교에 대한 불만은 상당히 누그러졌다.

그는 남산에 위치한 자신의 집으로 Y고교 출신 언론인들을 종종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송대관 씨가 지난 7일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향년 79세. 그의 작고 소식에 문득 여씨춘추(呂氏春秋)의 한 고사(故事)를 떠올렸다. 백아절현(伯牙絶絃)이다.내용은 이렇다.

춘추시대에 백아라는 이름의 거문고 악사가 있었다. 그에게는 음률을 듣고 악상을 이해하는 종자기란 친구가 있다. 백아가 높은 산에 오르는 정경을 연주하면 종자기는 "굉장하다. 태산이 우뚝 솟은 느낌이다."라고 찬탄했다. 인생과 자연을 관통하는 선율에는 곧바로 알아듣고 감탄사로 추임새를 넣은 거다.

시냇물이 흐르고 벌 나비가 잉잉대는 선율에서는 봄의 정취를 느끼고, 천둥번개와 거센 바람소리가 현(絃)으로 울려오면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가는 한여름을 연상했다. 그야말로 지음지기(知音知己)였던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만일 종자기가 아니라 예인(藝人) 백아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면 종자기는 어땠을까. 절대음감을 가진 그로서는 그저 주인 잃은 거문고를 안고 추억에만 잠겨 있어야 하나. 송대관을 잃은 대중은 이제 어떻게 그 구성진 노래와 입담을 대할 것인가.

하지만 현대의 예인(藝人)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 음반이 아니라 mp3로 언제든지 재생할 수 있다. 스마트폰 영상으로 젊은 날부터 장년의 원숙한 모습까지 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이와 함께 여물어가는 노래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은 커다란 아쉬움이다.

마치 작고한 가수 김정구가 젊은 날 불렀던 ‘눈물 젖은 두만강’보다 초로의 신사가 돼 부르는 두만강이 훨씬 정감이 묻어나지 않던가. 그래서 송대관의 네 박자를 80대 목소리로 들을 수 없게 된 상황이 아쉽다. 이보다는 50년 전 시대의 아이콘이 된 ‘해 뜰 날’을 다시 상기시키는 현실이 답답하다.

군사독재와 10월유신의 엄혹한 시대에 희망의 노래로 태어난 ‘해 뜰 날’은 1980년 군사쿠데타로 좌절된 ‘서울의 봄’을 거쳐 1987년의 ‘6월 항쟁’을 통해 마침내 ‘해 뜬 날’을 이뤄냈다. 1997년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OECD(경제개발협력기구)의 일원이 됐다.

그런데 이 ‘해 뜬 날’ 시대에 느닷없이 한 무더기 먹장구름이 몰려온 거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철권통치시대 비상계엄이 발동된 것이다. 그렇잖아도 미-중 경제갈등에 낀 한국 경제에 빨간 불이 들어온 상태 아닌가. 한국의 가계부채는 2000조원 수준까지 쌓였다.

이런 상황에서 헌정 위기의 눈보라와 칼바람은 서울 서부지법을 휩쓸고 광장을 둘로 가르고 헌법재판소를 흔들고 있다. 그 여파로 한국의 대외신인도가 추락하고 경제난 가중은 물론 국민적 자부심에도 멍이 들었다. 때마침 불어 닥친 입춘 추위에 또다시 송대관의 ‘해 뜰 날’이 소환될 줄이야.

그나마 민주 시민들의 회복탄력성으로 '내란'은 종식되고 있는 중이다. 비록 후유증은 있지만 전 국민적으로 울린 경종은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우리 민주화의 뿌리를 좀 더 튼튼하게 할 것이다. 다만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과정에서 보여준 윤 대통령의 처신과 자세는 부끄럽다.

백아절현의 출전인 여씨춘추에 엄이도종(掩耳盜鐘) 이야기도 나온다.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는 거다. 진나라 혼란기에 한 도둑이 범씨 가문의 가보인 종을 훔치려 했다. 하지만 종이 크고 무거워 들고 나갈 수 없었다. 종을 쪼개려고 망치로 내려치니 종소리가 크게 울리지 않는가. 도둑은 깜짝 놀라 자신의 귀를 틀어막고 망치질을 하다 붙잡혔다는 거다.

자신의 귀에 들리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듣지 못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경고한 거다. 우리네 속담으로는 "눈 가리고 아웅한다"거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상황이겠다. 위기에 처하면 덤불 속에 머리를 처박고 숨는 꿩은 그나마 엉덩이를 쳐들어 마른 풀섶인 것처럼 위장하기라도 하는데 말이다.

엄이도종(掩耳盜鐘)은 2011년 교수신문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이기도 하다.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의 비판과 비난에 귀를 막는 이명박 정부 행태를 지적한 거다. 사실 이 사자성어는 헌법재판소와 구치소 접견 정치를 통해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대통령에게 딱 맞지 않을까.

여야의 주요 정치인이 아니라 간첩을 싹 잡아들이라고 했고, 국회의원이 아니라 요원(툭전사)을 끄집어내라고 했다는 주장에 그를 지지했던 보수 인사들마저 혀를 차며 고개를 젓고 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의 아전인수(我田引水)식 억지와 국군 최고 통수권자로서 책임을 부하에게 떠넘기는 상황을 TV로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엄동설한도 한 줄기 봄바람에 스러질 것이다. 우수가 지나면 얼었던 강물도 풀릴 터이다. 촛불과 응원봉을 든 시민들의 뜨거운 열정과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꽁꽁 언 경제를 녹이고 답답한 정치도 뚫었으면 좋겠다. 50년 전에도 그랬지만 머지않아 ‘해뜰날’이 틀림없이 다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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