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비사㉗] 'NPT 탈퇴' 김일성 생일에…美 승인 단체 방북
  • 김정수 기자
  • 입력: 2025.02.09 00:00 / 수정: 2025.02.09 00:00
북핵 문제 대두 직전, 美 허가 떨어져
하필 시기가...정부 당혹, 각국 동향 파악
중·러, 사절단 안 보내...北에 불만 표명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우리 정부가 1993년 4월 15일 북한 김일성의 생일을 앞두고 각국의 사절단 파견 여부를 확인했던 상황을 재구성했다. 당시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전격 발표, 북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던 때였다. /임영무 기자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우리 정부가 1993년 4월 15일 북한 김일성의 생일을 앞두고 각국의 사절단 파견 여부를 확인했던 상황을 재구성했다. 당시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전격 발표, 북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던 때였다. /임영무 기자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1993년 2월 어느 날, 리처드 알렌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좌관은 주미 한국대사관에 "김일성 생일에 맞춰 'Worldwide Leadership Council'이라는 단체가 방북을 준비한다는데, 김일성·김정일 축하 서한에 나도 동참해 달라고 한다"고 알렸다.

당시는 북한의 핵 문제가 불거지던 때였다. 북한은 핵 개발 의혹과 관련해 국제원자력기구(IAEA) 임시 사찰팀의 사찰을 받은 뒤였고, IAEA의 특별사찰 수락 압박을 받고 있었다. 미국 측에서는 향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우리 정부에 미리 귀띔한 것으로 보인다.

단체의 방북일은 김일성의 81번째 생일(4월 15일)에 맞춰 1993년 4월 10~17일로 계획됐다. 평양에서 열리는 '4월의 봄 친선 예술 축전'에 참석하는 식으로 단장 1명과 음악인 9명, 제작 관계자 3명 등 모두 13명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들은 김일성·김정일 축하 서한 앨범을 전달하고 복음성가와 포크송을 공연하겠다는 계획도 덧붙였다.

정부는 즉각 미국 국무부에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이어 해당 단체의 방북이 '북한 여행의 알선 및 추진을 금지시킨 적성국가에 대한 외국자산 규제법'에 저촉되는지 문의했다. 미 국무부 측은 "당연히 규정에 저촉된다"며 "재무부와 상무부에 이를 통보할 것이고 단체 책임자에 대해서도 허가 없는 여행 주선은 불법임을 경고하겠다"고 답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1993년 3월 12일.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전격 선언했다. 미신고 시설에 대한 IAEA의 사찰을 거부하고, 한미 팀스피리트 훈련을 빌미로 삼아 조약 탈퇴를 발표한 것이다. 북핵 위협이 수면 위로 급부상하면서 외교 시계도 숨 가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주미 한국대사관으로부터 한 통의 전문이 도착했다.

당시 정부가 파악한 김일성 생일 축하 미국 음악단 방북 문서. 우리 정부가 북한의 NPT 탈퇴 이후 북핵 문제에 몰두하고 있던 사이, 해당 단체는 미 상무부와 재무부로부터 방북 허가를 받아냈다. /외교부 제공
당시 정부가 파악한 '김일성 생일 축하 미국 음악단 방북' 문서. 우리 정부가 북한의 NPT 탈퇴 이후 북핵 문제에 몰두하고 있던 사이, 해당 단체는 미 상무부와 재무부로부터 방북 허가를 받아냈다. /외교부 제공

중단된 줄 알았던 Worldwide Leadership Council 단체의 방북이 최종 승인됐다는 소식이었다. 우리 정부가 북핵 문제에 몰두하고 있던 때, 해당 단체가 미 상무부와 재무부에 방북 허가를 받아낸 것이었다. 이에 미 국무부도 어쩔 수 없이 △예술·종교 활동 외 투자·상업활동 금지 △북한 측의 명시적인 신변 안전 보장 등의 조건을 걸고 단체의 방북을 허가하기로 했다.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북한의 핵 개발 야심을 국제사회와의 공조로 막아내야 하는 와중에 '미국의 도장'을 받은 단체가 김일성의 생일 축하를 위해 북한으로 가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이에 영향을 받은 해외 기관·단체 등의 방북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북한이 이를 핵 개발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일로 역이용할 수 있다는 위험도 있었다. 이에 정부는 곧바로 김일성 생일과 관련한 각국의 동향 파악에 나섰다.

불가리아는 김일성 생일을 맞아 교육, 과학, 문화부 소속 공무원 1명을 비롯해 예술단 4명이 방북할 예정이었다. 곧바로 주불가리아 대사는 불가리아 측에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 개발 저지를 위해 부심하고 있는데 당혹스럽다"며 "북한으로 하여금 주재국 입장을 오판하게 할 수 있음을 우려한다"고 말했다.

이에 불가리아 측은 "예술단 파견은 보고 받지 못했지만 상세 사항을 파악해 예술단이 방북하지 못하도록 협조하겠다"고 답했다. 주불가리아 대사는 거듭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경우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정세는 최악의 사태를 맞게 될 것"이라며 "핵 문제는 시급한 과제로서 최단 시일 내에 해결돼야 하므로 지속적으로 협조해 달라"고 촉구했다.

주불가리아 대사는 불가리아 외무차관과 만나 예술단 파견을 반대하는 입장을 전했다. 주불가리아 대사는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 개발 저지를 위해 부심하고 있다며 4·15 행사에 예술단까지 파견하는 데 우리 정부가 당혹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교부 제공
주불가리아 대사는 불가리아 외무차관과 만나 예술단 파견을 반대하는 입장을 전했다. 주불가리아 대사는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 개발 저지를 위해 부심하고 있다"며 "4·15 행사에 예술단까지 파견하는 데 우리 정부가 당혹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교부 제공

파키스탄에서는 이미 10명의 사절단이 김일성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북한으로 떠난 뒤였다. 이를 포함해 파키스탄 의회 사절단 7명도 북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에티오피아는 자국 소재 북한대사관에서 열린 리셉션에 관계자를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당시 북한 측은 에티오피아에 사절단 파견을 집요하게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뒤였다.

중국은 축하 사절단을 북한에 보내지 않았지만, 주중 북한대사관에서 열린 김일성 생일 기념 만찬에 정부 관계자들을 참석시켰다. 러시아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사절단 파견이 아닌 주나호드카(나홋카) 북한 총영사관, 주러 북한 대사관 등에 정부 관계자들을 보내는 데 그쳤다. 중국과 러시아도 북한의 NPT 탈퇴에 나름대로 불만을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우리 정부가 파악한 '김일성 생일 행사 참석 각료급 인사' 명부는 다음과 같다.

△산토메 프린시페(상투메 프린시페) 정부 대표단 △잠비아 정부 대표단 △에쿠아돌(에콰도르) 외무성 대표단 △칠레 대통령 특사 △네팔 정부 대표단 △루완다(르완다) 대통령 특사 △말디브 제도(몰디브공화국) 대통령 특사 △방글라데시 당 및 정부대표단 △부룬디 정부 대표단 △파키스탄 정부 친선 대표단 △프랑스 대통령 특사 △카메룬 정부 대표단 △콩고 정부 대표단 △토고 정부 대표단 △부르키나파소 정부 대표단 △카뽀 베르데(카보베르데) 정부 대표단 △모잠비크 대통령 특사 △모리셔스 정부 대표단 △스위스 대통령 특사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 특사 △팔레스티나(팔레스타인) △이집트 대통령 특사 △이란 정부 대표단 △튀니지 정부 대표단

js8814@tf.co.kr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 이메일: jebo@tf.co.kr
· 뉴스 홈페이지: https://talk.tf.co.kr/bbs/report/write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