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통'파면'] '선거여왕에서 파면까지' 박 대통령 굴곡의 18년 정치사
입력: 2017.03.10 11:32 / 수정: 2017.03.10 11:51

박근혜 대통령이 10일 오전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판결에 따라 파편됐다. 박 대통령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18년 정치 인생을 마무리하게 됐다. / 임영무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10일 오전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판결에 따라 파편됐다. 박 대통령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18년 정치 인생을 마무리하게 됐다. / 임영무 기자

[더팩트 | 서민지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불명예'를 안고 18년 정치 인생을 마무리 했다. 10일 그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으로 파면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헌법재판소는 이날 오전 박 대통령의 탄핵 심판을 재판관 8인 전원 '탄핵 인용'으로 결정했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가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해 헌재로 넘긴 지 91일 만이다.

집권 4년 차에 터진 '최순실 게이트'는 박 대통령의 18년 정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청와대에서 부모를 모두 총탄에 잃은 뒤 고독의 세월을 청산하고 정치를 결심하게 된 세월도 꼬박 18년이 걸렸다. 대통령에 당선된 박 대통령은 2013년 2월 떠난 지 33년 3개월 만에 청와대로 '컴백'했지만, 남은 임기 9개월을 채우지 못한 채 또 다시 청와대를 떠나게 됐다.

'5선 의원에 첫 여성대통령'의 이력을 지닌 박 대통령은 1997년 대선 직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지원 요청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구미 지구당에 입당 원서를 제출했다. "IMF 위기를 맞아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 때문에 정치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제18대 대통령 취임식 세리머니 당시.(왼쪽) 지난해 12월 29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박 대통령. /더팩트DB, 청와대 제공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제18대 대통령 취임식 세리머니 당시.(왼쪽) 지난해 12월 29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박 대통령. /더팩트DB, 청와대 제공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이들로부터 '아이돌'급 인기를 얻으며 정치인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1998년 4월 재보궐선거에서 대구 달성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회창 후보가 대선에서 연거푸 패배하자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당대표로 선출됐다.

박 대통령은 위기 상황의 당을 수차례 일으키면서 유력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한나라당의 '차떼기(정치자금 수수)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전망이 어둡던 총선에서 '천막 당사'를 발판으로 모두 121석을 얻었다. 이후 대표직에 있는 2년 3개월 동안 사실상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어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2007년 유력 대권주자로 발돋움한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다. 그러나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패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두 사람의 갈등은 고조됐고, 박 대통령과 '친박(친박근혜)'세력은 비주류로 전락했다. '박근혜 총리 카드'를 둘러싸고 혼선을 빚었고, 2008년 4월 총선 때는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당시 한나라당) 등 친박계 인사가 대거 공천 탈락했다. 이른바 '공천 학살'에 박 대통령은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했다.

이 전 대통령과 박 대통령의 갈등은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에서 폭발했고 박 대통령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원안을 고수했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켰고,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다져 2012년 대선 승리의 밑거름을 만들었다.

2011년 10월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시장 후보로 나온 나경원 자유한국당 의원과 회동을 하고 있다.(왼쪽 위) 2012년 4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린 가운데 당시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이던 박 대통령이 박근혜 키즈로 불렸던 이준석 비대위원과 여의도 당사에서 활짝 웃고 있다.(오른쪽 위)  2012년 12월 4일 TV토론회에 출연한 이정희·문재인·박근혜 대선후보.(아래) /더팩트DB
2011년 10월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시장 후보로 나온 나경원 자유한국당 의원과 회동을 하고 있다.(왼쪽 위) 2012년 4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린 가운데 당시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이던 박 대통령이 '박근혜 키즈'로 불렸던 이준석 비대위원과 여의도 당사에서 활짝 웃고 있다.(오른쪽 위) 2012년 12월 4일 TV토론회에 출연한 이정희·문재인·박근혜 대선후보.(아래) /더팩트DB

2011년 가을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디도스 공격 의혹 등으로 흔들리자 2011년 12월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해 또 한번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당의 로고, 상징색부터 당명도 새누리당으로 바꾸는 등 당 개혁을 주도했다. 결국 19대 총선에서 야당을 누르고 과반의석(152석)을 차지했다.

2012년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압도적인 득표율(84%)로 당 대선 후보에 선출됐다.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중도 사퇴한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 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지원과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의 사퇴를 발판으로 마지막까지 추격했지만 국민 대통합과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내세우며 51.6% 득표율로 승리했다.

취임 후에도 박 대통령은 30%대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펼쳐 왔다. 하지만 집권 4년 차에 터진 '최순실 게이트'로 일순간에 국민에게 '즉각 하야' 요구를 받았다. 탄핵심판 법리싸움이 18년 정치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지만, 결국 박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mj79@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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