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박종권 편집위원] 지난 토요일(27일) 더불어민주당의 전당대회가 끝났다. 예상대로 '진격의 친문(親文)'이다. 더는 좌고우면(左顧右眄)할 필요가 없이 이대로 쭉 밀어붙이면 된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대권주자는 이미 확고부동하고, 차제에 당권까지 확실히 잡았으니 이제 거칠 것이 없다는 생각일 것이다. 소위 '친문'의 '일선(一線)'들이 주판알을 튕긴 대로, 또 작용한 대로 모든 일이 착착 일사천리 진행되는 것 같다.
전당대회가 끝나고 잠룡(潛龍)급을 비롯한 몇몇이 서로 옆구리를 쿡쿡 찔러 만났다고 한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안희정 충남지사, 여기에 이낙연 전남지사와 신경민 국회의원이다. '일선(一線)'이 아닌 '이선(二線)' '삼선(三線)'들이다. 이들이 서울시장 공관에서 모여 걱정스럽게 당의 앞날을 논의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정권교체에 문(文)만으로는 분명히 안 된다. 외연을 확장해야 하는데, 오히려 담장을 높이는 결과 아닐까. 자칫 현 정권의 연장을 결과적으로 도와주는 셈이 되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실망이다. 차기 혹은 차차기 대선주자급이 모여 겨우 덧셈과 뺄셈의 1차원적 '정치 수학'이나 논했다는 말이 아닌가.

학문으로써 정치학을 영어로 옮길 때는 조금 망설여진다. 대체로 팔러틱스(Politics)라고 하지만, 미국의 경우 대학마다 표현이 다르다. 예컨대 하버드 대학은 거버먼트(Government)이다. 혹자는 정치학이 아니라 행정학이라고 주장하지만, 엄연히 정치학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센델도 이 학과 교수이다. 한화그룹의 3세대 장남으로 한화큐셀 전무인 김동관 씨가 이 학과 출신이다. 그를 소개할 때 당연히 하버드 정치학 학사라고 한다.
스탠포드 대학이나 컬럼비아 대학은 팔러티컬 사이언스(Political Science)라고 한다. 그대로 옮기면 정치과학쯤이다. 실용 학문이 아닌 학문 그 자체로서의 학문은 크게 아트(Art)와 사이언스(Science)로 분류된다. 일반 정치인들이야 "정치는 예술"이라고 주장하지만, 학문적으론 엄연히 '과학'에 속하는 것이다.
프린스턴 대학은 팔러틱스(Politics)다. 같은 정치학이라도 거버먼트(Government)에서는 정부의 작동원리 같은 현실성이, 팔러티컬 사이언스(Political Science)에서는 비교와 검증을 통한 과학성이, 팔러틱스(Politics)에서는 학문으로서 순수성이 느껴진다.
우리에게는 미국에 없는 '정치공학'이 있다. 굳이 영어로 옮긴다면 팔러티컬 엔지니어링(Political Engineering)쯤 일까. 용어가 곧 속성을 나타낸다고 한다. 아마도 정치공학은 현실적이거나 과학적이거나 순수하지 않은, 조작(操作)을 통해 만들어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간단히 표현하면 정치조작이나 조작 정치, 잘 포장하면 '창조 정치'쯤이다.
민주주의 정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목표일 것이다. 이를 구현하는 방법은 '소통을 통한 갈등의 해소'일 것이다. 정당은 '꿈과 비전 제시를 통한 집권'이란 목표 아래 모인 정치집단이다. 그런데 '정치공학'에 물든 우리네 정당은 꿈이나 비전은 없고 '집권'에만 몰두한다.

새누리당에서 이정현 대표가 선출 됐을 때, 지지자들은 정치공학적 집권 방정식을 공공연히 거론했다. 머릿수로 독보적인 TK의 지역 기반에, 전남 출신 당 대표, 여기에 충청 출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대선주자로 세우면 정권재창출은 확실하다는 셈법이다.
지난 토요일 끝난 더민주 전당대회는 데칼코마니처럼 좌우로 닮았다. 지지자들 생각은 이럴 것이다. 지금이야 불만의 목소리가 높지만 어차피 호남은 전통적인 지지기반이 아닌가. 설령 국민의당 주자와 3파전이 이뤄진다 해도 잘 하면 60%는 가져올 수 있다. 게다가 PK의 대선주자에, 수도권 젊은 표심은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 드러났듯이 야권 성향이다. 여기에 당 대표가 TK 출신이면, 그림이 그럴듯하지 않은가.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친박' 세력이 드러내놓고 이 대표를 민 것이나, 더민주의 '친문' 세력이 추미애 대표를 민 것도 이러한 정치공학적 셈법이 작동한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정치공학 함수(函數)는 상수(常數)를 키우고 변수(變數)를 줄이려 한다. 어떠한 상황에도 'O, X'의 결과는 변하지 않도록 말이다. 문제는 상수처럼 보이는 지역 민심이, 설령 변수가 된다고 해도 찻잔 속 태풍에 불과할 것으로 보이는 변화에 대한 욕구가 때론 태풍으로 자라는 것이다.
적도 부근 태평양 수온이 조금만 높아지면 엘니뇨가, 조금만 낮아지면 라니냐가 발생해 전 지구적 기후를 뒤흔든다. 그 온도 차이야 2~3도에 불과해도 파괴력은 엄청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민심의 온도는 어떨까. 부글부글 끓고 있을까, 차갑게 얼어붙고 있을까. 그 어느 쪽이라도 '이상기후'는 불가피하지 않을까.
좀 뜬금없는 말 같지만, 초중고교 교실의 '급훈'을 보자. 성실, 책임, 노력, 희망 등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 급훈은 지향점이 동시에 그들의 부족한 부분을 그대로 반영한다. 예컨대 '성실'을 내세우는 학급은 상대적으로 성실하지 않은 학생들이 많은 것이다. 이미 모두가 성실하다면 굳이 '성실'을 모토로 내세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정당 명칭에서도 그런 것이 보인다. 새누리당은 '새로운 세상'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하는 행태는 '아, 옛날이여~' 느낌이다. '도로 공화당'으로 회귀하는 것 같다. 더민주는 '더불어'을 내세웠지만, '나 혼자' 느낌이다. 덧셈보다는 뺄셈, 여럿보다 우리가(만) 하겠다는 의지가 강해 보인다.
이는 모두가 정치를 '공학'으로 풀기 때문이다. 공학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를 중요시 한다. 4 더하기 3이나, 3 더하기 4나 마찬가지란 이야기다. 개, 돼지가 아니라면 원숭이로 대하면 되며,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정치가 아니다. 협잡이며, 기만이며, 착취이며, 도적질이다. 국민을 팔아 제 뱃속을 채우는 것이다.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정치인을 위한 국민으로 보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그런 폐해조차 은근슬쩍 국민 탓으로 돌린다. 당신들이 우리를 선택하지 않았느냐고, 결국 당신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냐고.
민심은 과연 언제까지 '찻잔 속의 변수'로 머물러야 하나. 배를 띄우기만 하고 뒤집지 못하는 물은 '파도 없는 바다'이다. 파도 없이 정체된 '닫힌 바다'는 결국, 적조현상으로 썩게 마련이다. 스스로 숨을 쉬기 위해서도 바람을 일으켜야 하고, 파도를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바다도, 민심도 생명력을 되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