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레스센터=오경희 기자] "'정치 시력' 되찾는 '안과 수술'하고 돌아왔습니다."
새누리당의 '원조 소장파' 원희룡(50) 전 의원이 정계로 돌아왔다. 원 전 의원은 2012년 총선 당시 불출마를 선언하고, 12년 정치 생활을 잠시 접었다. "대선에 기여하겠다"는 게 명분이었지만 속내는 지난 시간에 대한 좌절감이 컸다. '개혁적 보수주의자'란 타이틀은 그에게 '양날의 검'이었고, 현실 정치에서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정계를 떠나면서 자신의 블로그에 남긴 "꿈에서 나와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는 한마디에 심경이 묻어난다.
'정치인'에서 '국민'으로 돌아갔을 때 처음은 어색했다. 지근거리에서 일거수일투족을 보좌하던 사람들 대신 모든 것을 (그의 말을 빌려)'셀프'로 해야 했다. 당연한 일인데도 정계를 떠난 것을 때때로 실감했다. 하지만 곧 적응했다. '힘들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이제 커피숍이 사무실이고, 휴대전화가 보좌진"이라며 호탕하게 웃어 넘긴다.
2년여 동안 '백수' 생활을 하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다. 열아홉 살에 만나 30여 년을 함께해온 아내와 여행을 다니면서 오랜만에 남편 노릇을 하고, 12년 정치 경험의 실패가 무엇인지 가슴 깊이 고민했다. 그 반성의 시간을 최근 펴낸 자서전 '누가 미친 정치를 지배하는가'에 오롯이 담았다.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뜻을 앎)'의 나이 쉰.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인생의 중간점에 섰다. "언제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지 모르겠다"며 눈을 지그시 감는다. 인생 초반 '수석의 제왕'으로 마음만 먹으면 1등을 했지만, '정치 수석'의 길은 쉽지 않았다. 그는 최근 '개인정보 유출사태' 무료소송과 제주지사 출마설([P-TODAY 직격 토크] 원희룡 "제주지사 출마, 가능성 크다…대권 꿈꿔")로 정가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이제 실패를 밑거름 삼아 정치의 길 위에서 다시 '레이스'를 펼치려는 그를 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기자클럽에서 마주했다.

◆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이를 악물었다"
원 전 의원은 학창시절 '수석의 제왕'으로 이름을 날렸다. 제주도 서귀포 출신으로 1982년 대입학력고사 전국 수석·서울대 법대 수석 입학, 34회 사법시험 수석 합격으로 유명했다. 가난한 시골청년의 '집념'이 맺은 결실이다. 2남 4녀의 둘째로 태어난 그는 가난 앞에 무릎 꿇어야 했던 부모를 보며 공부에 열중했다. 그렇다고 모범생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잔칫집에 안 데려가면 1㎞ 도로 위를 달려 쫓아갔고, 짝꿍을 친구한테 뺏겨 심통이 나자 무단결석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감귤 농사를 했어요. 당시에는 열매도 안 달리는 감귤이라 돈을 벌 수 없었죠. 호기심이 많았던 아버지는 배추·고무신·농약 장사에 이어 마지막엔 서점을 하셨어요. 다 망하기는 했지만…. 초등학생 땐가. 어느 날 학교에 안 가고 밭에서 놀고 있었는데 빚쟁이들이 몰려와서 부모님이 처참하게 당하는 걸 봤어요. 공부를 열심히 해서 가난에서 벗어나야 겠다고 다짐하며 이를 악물고 공부했죠. 그렇다고 공부만 한 건 아니에요. 워낙 개구쟁이였으니까(웃음)."
가난은 그를 '운동권'으로 이끌었다. '수석'이라는 기득권을 버리고, 서울대 재학시절 시위에 참여해 유기정학을 당한 뒤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민주화운동이 뜨겁던 1980년대 서울은 그가 동경하던 곳이 아니었다.
"1982년 대학에 들어가서 학생운동을 했죠. 학교에선 나오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정학이죠. 이후 구로공단에서 일하고, 인천에서 야학과 공장생활을 하며 노동운동을 했어요. 지금도 후회는 없어요. 당시 시대상황이 그랬으니까."

◆ '수석의 제왕'도 넘기 힘든 '현실 정치'의 벽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정치에 입문해 16~18대 3선 의원의 고지에 올랐다. 서른 여섯에 금배지를 단 후 당내 요직을 맡았고, '미스터 쓴소리'로 불릴 만큼 '원조 소장파'로 자리매김했다. 2003년에는 열린우리당 개혁파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에 맞서 한나라당 개혁파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으로 불리며 당에 쓴소리를 내뱉는 등 '개혁파'의 이미지를 굳혔다.
때문에 비주류인데도 여권에선 '차기 대권주자'로 꾸준히 거론됐다. 하지만 그는 3선 의원에서 멈춰 섰다. 2012년 총선 당시 "대선에 기여하겠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를 두고도 '공천을 못 받을까 봐 그런 것 아니냐' 등 뒷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꿈을 재충전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서른 여섯에 처음 정계에 입문했고, 12년 동안 금배지를 세 번 달았어요. 나름 열정을 가지고 일했지만 좌절감이 컸어요. 정치라는 게 권력에 대한 투쟁이기 때문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었죠. '원조 소장파'로 불렸지만 정당 정치 속에서 제 소신을 지키려면 반발에 부딪히고, 집단 논리에 맞추려면 제 소신하고 멀어질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졌죠. 이 충돌에서 12년 동안 단 한번도 자유로운 날이 없었어요. 그래서 떠났죠."

◆'정치인 원희룡'에서 '국민 백수' 되던 날
'국민 원희룡'은 꿈에서 잠시 나와 자유를 즐겼다. '백수'가 된 첫날, 혼자 미용실에 가서 '인증 사진'을 찍고 트위터에 올렸다. '정치인 원희룡'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온 순간이다. 지근거리에서 보좌할 사람도 의원실도 없이 모든 것을 혼자서 해야 하는 게 처음엔 낯설었다. 생일 때마다 의원실 식구들과 함께 생일 파티를 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삐돌이 원희룡"이란 농담을 주고받던 시간도 추억일 뿐이다. 올해 생일은 가족들과 조촐하게 보냈다.
"늘 옆에서 이것저것 도와주던 보좌진이 있다 없으니 처음엔 낯설었어요. 뭐든지 '셀프'로 해야하니까요. '아, 나도 물들었구나' 싶었죠. 하지만 곧 익숙해졌어요. 원래 혼자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뭐 이제 커피숍이 제 사무실이고, 제가 정하는 약속이 곧 일정표죠."

모처럼 백수 생활에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인터뷰 하러 오기 전에도 아내와 딸을 직장과 학교에 데려다 줬다. 일상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와 함께 1년 동안 유럽과 중국을 여행했다. 두 사람은 서울대 82학번 동기다. 대학에서 아내 강윤형씨를 만나 친구로 10여 년을 지내고, 서른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아빠는 삐돌이"라고 부르며 친구처럼 지내는 대학 3학년 큰 딸과 대안고등학교를 나와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둘째 딸이 그에겐 '보물'이다. 여행지에서 20년 전 신혼생활의 단꿈을 꿨고, 앞만 보며 달려온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다.
"정치권 밖에서 멀쩡했던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면 이상해진다고 하잖아요. 저 자신에 대한 거리를 두고 싶었어요. 저의 시력을 다시 되찾는, 뭐랄까 '안과 수술'이 필요했죠. 국내에 있으면 단절이 잘 안되니까 평소 가보고 싶었던 유럽과 중국으로 떠났죠. 1년 이상 머물고 싶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고, 어려운 시국에 주변 시선도 있고 해서 딱 1년 여행했어요. 중국어도 배우고 미세먼지도 실컷 마시고(웃음). 아내는 신혼 때로 돌아간 것 같다며 즐거워했죠."

◆ "어느덧 쉰, '정치 열정' 불태우고 싶다"
한 달 전 그는 쉰을 맞았다. 어느덧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가 됐다. 인생의 중간점에 선 그는 한국 정치 지형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대권'에 대한 꿈도 가슴에 뜨겁게 품고 있다. 정치 열정을 불태우고 난 뒤 인생 후반전, 아름다운 은퇴를 꿈꾼다.
"저는 '개혁 보수주의자'예요. 정치가 기득권 권력의 논리에 따라 국민들에게 약속한 초심에서 멀어지고 그런 부분에 대해 비판적이고 바꿔보자는 데서 정치를 시작했으니까요. 지난 12년 경험을 밑거름 삼아 한국 정치를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고민과 실천을 할 겁니다. 대권요? 60세가 되기 전에 해야죠. '대통령병'에 걸린 게 아니라 대권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나라 비전을 어떻게 그려나가는가, 국민들의 꿈을 어떻게 정책으로 만들어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준비이기 때문이에요. 인생 후반전엔 시민단체 활동 등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아름다운 은퇴'를 하고 싶습니다."
<사진=최진석 기자>
정치팀 ptoday@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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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ODAY가 만난 사람] '돌아온' 원희룡 "'백수' 생활 동안 '안과 수술'"(http://youtu.be/KvGQw1kZZ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