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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또는 기자를 꿈꿨던 서영교 당선자는 학생운동을 겪으며 지역운동가로 변신했고, 그 경험이 오늘날 국회의원 자리에 오르게 했다. / 이새롬 기자 |
[소미연 기자] 모전여전(母傳女傳). 서영교(47) 당선자의 힘 있고 당찬 모습은 그의 어머니 이영자(81) 여사를 닮았다. 이 여사는 서 당선자가 나라와 지역의 일꾼이 되는 모습을 기대하며 무려 40년을 기다렸다. 초등학생 시절 남자아이 못지않게 동네 계급장이란 계급장을 다 따오던 서 당선자를 보며 "얌전하게 있어라, 목소리가 왜 이렇게 크냐" 고 타박했지만 이 여사는 이내 생각을 달리했다. 서 당선자를 임신한 뒤 겪었던 노스님과의 일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를 임신하셨을 당시 어머니께선 경북 상주에 계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장사라는 절에서 노스님이 집에 오셨대요. 어머니께서 시주를 하자 스님께서 아이를 가졌냐고 물으셨는데, 그 스님이 남자로 태어나면 나라의 큰 인물이 되고 여자로 태어나면 영부인이 될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해요. 이후 제가 태어나자 그 스님이 또 한 번 저희 집을 찾아와선 제 이름을 '서영희'라고 지어주셨죠. 그래서 제가 이름이 두 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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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당선자의 어린시절 모습. 사진에서 아랫줄 우측이 서 당선자다. |
'특별한 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 여사는 그때부터 서 당선자의 미래를 그려왔던 것이다. 실제로도 이 여사는 서 당선자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혜원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서 당선자가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자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당시 학교발전기금 10만원을 쾌척했다. 딸의 기를 죽이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 서 당선자는 "우리 어머니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총학생회장을 하면서 리더십이 키워진 것 같아요. 당시 교장선생님께서 총학생회장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조회말씀'을 하게 했는데, 이 자료를 준비하고 발표하면서 능력을 키울 수 있었어요. 또, 학생회장은 응원단장이 되거든요. 사실 저도 몰랐어요. 저한테 이런 끼가 있었는지. 그때 서영교 팬클럽이 생길 정도였으니 인기가 대단했죠."
이후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서 당선자는 외교관이나 기자를 꿈꿨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학생운동은 절대 안하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동아리는 가입조차 안했다. 동아리에 들어가면 운동권이 된다는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서 당선자의 눈앞에서다. 한 여학생의 비명 소리, 한 남자가 여학생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가는데 이 여학생은 질질 끌려가면서도 "군부독재 물러가라"고 외쳤다. 이 모습을 본 서 당선자는 그길로 이 여학생 구출 작전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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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여고 총학생회장이었던 서 당선자는 한 달에 한 번씩 학우들 앞에서 '조회말씀'을 읽으며 리더십을 키웠다. 사진 아래는 이화여대 졸업 당시 학사모를 쓰고 가족들과 함께한 사진이다. |
"운명은 어쩔 수가 없나 봐요. 이 일을 겪고 난 뒤 가슴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이후 선배의 설득으로 공부를 시작했죠. 어머니 생각해서 공부만 할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총학생회장은 처음부터 쳐다보지도 않고 법정대 학생회장을 했어요. 총학생회장은 잡혀가도 법정대 학생회장은 잡아가지 않으니까. 그런데 정말 총학생회장이 잡혀갔고, 총학생회장을 또 뽑아야했어요. 당시 100주년 축제가 있었는데, 학생회비 결재를 총학생회장이 아니면 권한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다시 총학생회장을 뽑았고, 저희 때 총학생회장이 두 명이 됐어요."
총학생회장이 된 후로 서 당선자는 모든 집회에서 선봉에 섰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앓아온 류마티스열로 심장 판막에 이상이 발견됐지만 학생회 일을 안 할 순 없었다. 의사는 ‘죽는다’고 겁을 줬고, 어머니 이 여사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강했다. 딸의 학생회 일을 말리는 대신 학생회 사무실로 보약을 날랐던 것. 서 당선자가 치안본부에 잡혀갔을 때도 어머니는 지혜로웠다. '우리 딸을 살려달라'는 탄원서를 썼고, 모든 진료소와 의사들을 물론 고등학교 교장선생님과 대학 학장까지 총동원했다. 덕분에 서 당선자는 이틀 만에 징벌방에서 나왔고, 5개월의 감옥살이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지역운동을 했어요. 무료도서대여실을 열고 주부대학을 운영했죠. 그때도 어머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한 달에 5만원씩 용돈을 주셨죠. 돈이 없으면 사람이 추해진다면서. 대학까지 나온 딸이 얼마나 한심해 보이겠어요? 그런데 저희 어머닌 딸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남편과의 결혼도 쉽게 승낙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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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당선자는 대학 1학년때 만난 장유식 변호사와 7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
서 당선자는 남편 장유식(47) 변호사와 7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부부가 운동권에서 만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작 두 사람은 서로 운동권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만나서 연애만 했다"는 게 서 당선자의 설명이다. 서울대 공대학생회장을 지낸 장 변호사는 반핵운동을 했다. 서 당선자보다 일찌감치 수배령이 떨어져 도피생활을 오래했고, 결국 징역 1년을 살았다. 장 변호사는 영치금을 모아 서 당선자에게 금반지를 선물했다. 서 당선자와 장 변호사가 왼손가락에 하나씩 끼고 있는 반지가 바로 그 반지다.
"우리 남편이 예나 지금이나 돈에 관심이 없어요. 둘이 결혼할 때도 너무 없으니까 부모님께서 혹여 결혼을 반대하시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도리어 어머니는 사위가 좋다고 하셨어요. 이후에 남편이 직업을 갖기 위해 고민할 때도 어머니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죠. 어머니 꿈에 외할머니가 나오셔서 영희 남편에게 고시를 시키라고 하셨대요. 마침 저희 부부가 영화 '어퓨굿맨'을 봤는데, 군의 인권 문제를 변호사가 해결하는 과정을 보면서 관심을 갖던 참이었거든요. 4수 끝에 남편이 고시에 합격했죠."
장 변호사가 일을 찾은 이후부터 서 당선자는 정당에 발을 들여놨다. 새천년민주당 창당할 당시 자원봉사로 시작해 당 부대변인으로 승진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춘추관장과 지난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유세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바쁜 일상이지만 어머니 이 여사와 남편 장 변호사의 도움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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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당선자는 대학 졸업 후 지역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사진은 '푸른소나무 무료도서대여실'을 개설할 당시의 모습을 담았다. |
특히 19대 총선 출마를 앞두고 장고에 들어갔을 때도 두 사람은 서 당선자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어머니는 "내가 너를 정치시키려고 40년을 기다렸다"고 응원했고, 남편은 "세상이 바뀌었고, 바뀐 세상은 새로운 정치와 새로운 사람을 원하고 있다"며 출마 결심을 독려했다.
"늘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에요. 표현을 잘 못했지만 시부모님께도 정말 감사하죠. 아들 내외가 바쁘게 생활하니까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 중랑갑으로 이사를 오셨어요. 벌써 10년 됐죠. 저희 부모님을 위하고, 저희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정책을 만들고 힘쓴다면 행복한 중랑갑을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사진=서영교 당선자 제공>
[더팩트 정치팀 ptoday@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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