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석순의 스포츠 프리즘] 빨강머리로 단장한 박태환(21)이 2회 연속 아시안게임 3관왕을 자신하며 광저우로 떠났다.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그의 심경은 어떤 것일까. 어쨌든 한국 수영 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니 그에게 거는 기대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내색은 않았지만 ‘박태환 드림팀’이 받는 심적 부담은 어지간할 것이다.
박태환은 김연아과 함께 혜성처럼 나타난 이 시대 우리 스포츠계의 눈부신 아이콘이다. 우리가 언제 수영에서, 피겨 스케이팅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꿈이나 꿀 수 있었던가. 이 작은 땅에서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탄생했지만 수영의 기린아 박태환, 피겨 여왕 김연아의 올림픽 금메달이 주는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두 종목 모두 어느 날 불쑥 스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태환은 4년 전 도하에서 자유형 200m와 400m, 그리고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광저우에서는 최근 기록으로 보아 200m와 400m, 그리고 1,500m보다는 100m 쪽이 유리하리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박태환이 금메달을 기대하는 종목에는 만만찮은 호적수들이 있다. 자유형 200m와 400m, 그리고 1,500m에 함께 출전하는 중국의 장린(張琳 23)과 쑨양(孫楊 19)이다. 장린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400m 은메달리스트, 쑨양은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 1,500m 동메달리스트. 특히 박태환의 올림픽 금메달 종목인 400m의 올해 세계랭킹에서 둘은 박태환에 이어 2, 3위에 나란히 올라 있다. 1위 박태환 3분44초73, 2위 장린 3분44초91, 3위 쑨양 3분45초22. 1~3위 간격은 불과 0.49초다.
조금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황에서 ‘박태환 팀’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8일 서울을 떠나기 직전 도핑 검사를 받은 그에게 9일 광저우에 도착하자마자 또 도핑 검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도핑 테스트는 선수들의 금지약물 복용을 막기 위해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자체적으로 임의로 선정된 선수를 대상으로 불시에 실시하기도 하고, 세계적 레벨에 올라있는 선수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시행하기도 한다. 또 주요 국제대회에서 대회조직위 요청으로 실시되기도 한다.
베이징올림픽에서 황색돌풍을 일으키며 세계적 수영 스타로 떠오른 박태환으로서는 WADA의 특별관리를 받는 데 대해 불평할 일도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노민상 감독은 불과 이틀 사이에 서울과 광저우에서 두 번씩이나 실시된 도핑 검사에 노골적인 불만과 의심을 감추지 않았다. “혹시 중국의 신경전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며 불쾌해 했다.
프로복싱 황금기 때 이야기다. 외국 원정경기에서 챔피언 벨트를 매고 돌아온 한 선수가 털어놓았다. 경기 전날 밤 호텔에서 잠을 청하는데 어디선가 끊임없이 야릇한 소음이 들려오더라는 것이다. 숙면을 취해야 다음날 타이틀매치에서 제 기량을 발휘할 텐데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단다. ‘이거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때부터는 에어컨에서 나오는 찬바람에도 혹시 독가스가 든 건 아닐지 걱정되어 온밤을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큰돈과 명예가 걸려 있던 예전 프로복싱의 야화(野話)를 듣다보면 그런 현상이 다만 선수의 지나친 긴장과 걱정 때문에 생긴 노이로제였는지, 정말 상대선수를 해치려는 시도가 있었는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실제로 겨울철 따뜻한 남쪽 나라의 선수를 불러들여 타이틀매치를 할 때 장충체육관에 온풍기를 틀기는커녕 창문과 출입문을 활짝 열어 찬바람이 쌩쌩 불도록 한 일도 비일비재했었으니까.
올림픽 금메달 획득 이후 박태환은 아시아권 수영 선수들의 꿈이자 넘어야 할 목표가 되었다. 베이징올림픽 400m에서 박태환에게 0.58초 뒤져 은메달을 목에 건 장린은 “금메달리스트가 한국의 박태환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한국 선수(박태환)에게 지다니…’ 하는 아쉬움도 있었을 것이다. ‘마린보이’ 박태환과 마찬가지로 장린은 중국이 처음 배출한 올림픽 수영 메달리스트다. 그에게 거는 중국인들의 기대도 대단할 것이다.
지난해 로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박태환은 출전한 종목마다 예선 탈락하는 망신을 당했다. 그때의 실망감은 다음 올림픽은커녕 이번 아시안게임도 기대하기 어려웠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독기를 품고 훈련을 거듭해 지난 8월 팬퍼시픽대회에서 놀라울 만큼 기력을 회복했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는 마이클 볼 코치가 “베이징 올림픽 때보다 더 좋은 상태”라고 호언할 정도였다.
박태환 팀이 아시안게임 경기에 앞서 떨어내야할 것이 있다. 도핑 검사 등 부당한 견제에 대한 의심, 홈팀 선수들에 대한 신경과민이다. 레이스에 대한 집중이 그 첩경이다. 오직 자신의 기록과 싸워 이긴다는 결의가 필요하다.
박태환은 수영 첫날인 14일 200m에 출전한다. 올해 랭킹에서는 박태환이 1분46초27로 6위, 중국의 장린이 1분47초54로 19위. 중국 선수들에 대한 부담을 떨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 종목에선 오히려 랭킹 10위의 마쓰다 다케시가 위협적이다. 1분47초10으로 불과 0.74초 뒤져 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2007년 멜버른 세계선수권대회와 2008년 베이징 올림픽까지 연달아 금메달을 목에 건 박태환의 주종목 400m 레이스는 16일 벌어진다. 지난해 로마에서 박태환이 예선 탈락하는 동안 장린은 3분44초91의 아시아최고기록을 세웠다. 8월 팬퍼시픽대회에서는 박태환이 3분44초73으로 1위, 장린이 3분46초91로 3위.
광저우 아시안게임의 200m, 400m 레이스에서 이들의 도전을 뿌리친다면 ‘마린보이’ 박태환의 재활 프로그램도 완성되는 셈이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그에게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의 2연속 우승도 힘겨운 목표로 보이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