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호의 월드컵 파일] '호텔 로비의 소년' 마라도나, '제왕'으로 나타났다
  • 최순호 전 국가대표
  • 입력: 2026.06.16 00:00 / 수정: 2026.06.16 00:00
1986년 멕시코 월드컵 A조 1차전 아르헨티나와 경기
마라도나와 만남, 그리고 한국의 역사적 첫 골 순간
1986년 6월 2일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월드컵 A조 1차전에서 한국 축구 사상 월드컵 1호골을 기록한 박창선(가운데)과 어시스트를 한 최순호(오른쪽)./KFA
1986년 6월 2일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월드컵 A조 1차전에서 한국 축구 사상 월드컵 1호골을 기록한 박창선(가운데)과 어시스트를 한 최순호(오른쪽)./KFA

[더팩트 | 최순호 전 국가대표] "마라도나라는 거대한 폭풍, 세계 제왕과의 첫 조우"

1986년 6월 2일, 멕시코 올림피코 경기장의 잔디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32년 만에 밟은 월드컵 본선 무대, 그 첫 번째 상대는 당대 최고의 천재 디에고 마라도나와 호르헤 발다노가 버티고 있는 우승 후보 아르헨티나였다. 축구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기 전, 나는 그라운드 너머 마라도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내 기억 속 그와의 첫 만남은 1979년 일본 세계청소년대회(U-20)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숙소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는 곱슬머리에 그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7년의 세월이 흐른 뒤 결전의 무대에서 다시 만난 마라도나에게서 소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게선 세계 축구를 단숨에 지배하는 '제왕'의 서슬 퍼런 위용이 뿜어져 나왔다. 축구 황제 펠레가 "마라도나는 위대하지만, 오른발 슈팅과 헤딩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했음에도, 그날 마라도나가 보여준 왼발의 파괴력은 정상적인 전술과 방법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허정무 선배를 비롯한 우리 미드필드진이 육탄방어를 불사하며 그림자처럼 달라붙었지만, 그는 가볍게 압박을 벗겨내며 경기를 지배했다. 세계 최고라는 존재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체감한 순간, 월드컵이라는 무대가 가진 압도적인 높이와 무게감이 비로소 내 피부에 와닿았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끈 마라도나./AP.뉴시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끈 마라도나./AP.뉴시스

"세계와의 간극을 절감한 잔인한 90분"

아르헨티나가 뿜어내는 화력과 경기 운영 능력은 우리가 분석하고 예상했던 수준 그 이상이었다. 전반에만 연달아 실점하며 리드를 내주자 경기장 안의 공기는 급격히 무거워졌다. 공격수였던 나 역시 아르헨티나의 견고하고 노련한 수비벽에 막혀 좀처럼 활로를 찾지 못했다. 그들은 단순히 개인기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경기 템포를 조율하는 노련함, 수비 라인의 유기적인 간격 유지,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집중력까지 모든 면에서 노련한 타짜 같았다.

우리는 상대를 너무 몰랐고 세계의 벽은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우리의 수비진은 추가 실점을 막기 위해 뼈가 부서져라 뛰고 또 뛰었지만, 스코어는 1-3 패배였다. 개개인의 기량은 물론, 큰 무대 경험이라는 자산에서 비롯된 격차는 잔인할 정도로 명백했다. 당시 아시아 축구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그리고 세계 축구의 본류와 체감하는 간극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뼈저리게 절감한 잔인한 90분이었다.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 우리는 세계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체력과 투지 너머의 '기술과 경험'이 왜곡 없이 필요하다는 준엄한 교훈을 얻었다.

"박창선의 한 방, 암흑 속에 쏘아 올린 역사적인 신호탄"

그 처절한 패배의 현장 속에서도 한국 축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순간이 찬란하게 빛났다. 후반 28분, 상대 진영에서 기회를 엿보던 박창선 선배의 오른발 끝에서 마침내 기적이 터졌다. 내가 페널티바스 정면 외곽으로 건네준 볼을 박창선 선배가 호쾌한 중거리 슛으로 아르헨티나의 골망을 세차게 흔들었다.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기록한 '첫 번째 골'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박창선 선배는 한국의 역사적 1호골을, 나는 1호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비록 경기 결과는 아쉬운 패배로 끝났지만, 그 한 골이 지닌 가치는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계 최강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뽑아낸 그 첫 득점은 한국 축구가 변방에서 벗어나 세계 무대를 향해 당당히 첫발을 내디뎠음을 알리는 장엄한 서막이었다. 경기 결과에 낙담해 있던 우리 선수들의 가슴속에 "우리도 세계 무대에서 골을 넣을 수 있다"는 뜨거운 희망과 자신감이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그날 멕시코 하늘 아래 울려 퍼진 첫 골의 함성은, 훗날 한국 축구가 거대한 도전을 이어가게 만든 위대한 유산이자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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