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결승골의 주인공 오현규가 승리를 축하하러 다가오는 손흥민을 향해 허리를 숙여 90도로 절을 한다. 손흥민은 환한 미소로 후배를 끌어안으며 월드컵 데뷔골을 축하한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직후, 임시 주장 완장을 찼던 김민재는 가장 먼저 손흥민에게 달려가 그의 팔에 완장을 다시 채워준다.
12일(한국시간) 2026북중미 월드컵 A조 조별리그 1차전 체코전이 끝난 뒤 그라운드에 수놓아진 이 두 가지 장면은 오랫동안 진한 여운을 남긴다. 대표팀의 맏형이자 정신적 지주인 손흥민을 대하는 태극전사들의 진심 어린 존경(Respect)이 고스란히 묻어난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그것이 바로 축구가 가진 진짜 매력이며, 우리 선수들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였던 이유다.
황인범의 침착한 동점골 순간 체코 수비진의 발을 얼어붙게 만든 보이지 않는 힘, 그것은 전반 내내 외롭게 싸우며 상대의 체력을 갉아먹은 주장 손흥민의 위대한 희생 덕분이었다. 선수들은 그 희생의 무게를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체코와의 조별리그 1차전은 정신적으로 매우 까다로운 경기를 잘 헤쳐 나왔다는 점에서 분명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질문, 즉 ‘왜 우리는 이토록 어려운 경기를 해야만 했는가’에 대한 냉정한 분석은 빠져 있다.
월드컵 첫 경기라는 중압감은 상대도 마찬가지였을 터다. 체코 선수들의 압도적인 신장과 물리적인 힘이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날 체코의 경기 운영은 20여년 전의 클래식한 ‘롱볼 축구’가 전부였다. 높은 타점을 활용하기 위해 후방에서 길게 때려 놓고 전방에서 경합을 유도하는 단조로운 전개가 90분 내내 이어졌다. 패턴이 뻔한 공격은 우리 수비진 입장에서 오히려 대처하기 수월했다.
후반 14분 블라디미르 초우팔의 롱 스로인이 골마우스 정면까지 날아와 헤딩 동점골로 연결된 순간을 제외하면 말이다. 초우팔의 발은 잘 봉쇄했으면서도 그의 ‘팔’을 자유롭게 놔둔 것은 당초 전술판에 없던 뼈아픈 변수였다.

◆ 고립된 ‘원톱’ 손흥민, 그가 감내해야 했던 고행
진짜 문제는 답답했던 공격 전술에 있었다. 한국은 높은 점유율로 경기를 지배하는 듯 보였지만, 전방에 손흥민을 외롭게 세워둔 채 나머지 선수들은 수비적 포지셔닝에 무게를 두었다. 이른바 '손톱(SON-Top)' 시프트는 결과적으로 손흥민의 고립과 고군분투로 이어졌다.
손흥민이 두세 차례 결정적인 기회에서 끝내 골망을 흔들지 못한 것은 운이 따르지 않은 탓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팀 차원의 지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가 토트넘이나 지난 시즌 LAFC에서 골 폭발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동료들의 유기적인 움직임을 통한 '수비 분산 효과'가 존재했다.
이날 체코는 오직 손흥민을 저지하는 데 모든 초점을 맞췄다. 수비수들이 겹겹이 에워싸는 질식 수비 속에서 이강인의 날카로운 키패스가 몇 차례 배달되었고, 그나마 이재성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손흥민의 침투 공간을 만들어주려 관여하기는 했으나, 고립된 공격 형태 속에서 자유롭게 슛을 때릴 수 있는 환경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 가운데 전반 38분 박스 왼쪽 외곽에서 니어포스트를 겨냥한 왼발 감아차기 슛이 골대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장면은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고지대의 공기저항이 적어 계산했던 것보다 회전이 덜 먹힌 탓으로 보인다.
결국 동료들의 희박한 지원 속에 전방에 갇힌 손흥민은 볼을 받기 위해 중원까지 직접 내려오는 고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팀 전체가 수비를 염두에 둔 안정적인 경기운영에 치중하고 공격은 오로지 손흥민의 배후 침투에만 의존하다 보니, 그의 체력 소모가 극심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이는 경기 후반부 전반적인 컨디션 저하로 이어지는 부메랑이 됐다.

◆ '오현규 카드 적중'이라는 결과론에 가려진 진실
황인범의 동점골에 이은 오현규의 역전 결승골로 환호성이 터지자, 언론은 홍명보 감독의 용병술을 집중 조명했다. 에이스 손흥민을 빼고 월드컵 무대가 처음인 오현규를 투입하는 과단성을 보였고, 그 카드가 적중해 승리했으니 찬사가 쏟아질 법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본질이 있다. 당시 손흥민의 교체 타이밍은 경기를 집중해서 지켜본 시청자라면 누구나 직감할 수 있는 시점이었다. 그가 평소와 다르게 볼 터치가 길어지고 잔 실수가 생기기 시작했을 때, 타깃맨 오현규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비단 감독뿐만이 아니었다.
더욱이 황인범과 오현규가 승부를 뒤집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주역은, 역설적이게도 후반 중반 체력이 방전되어 교체 아웃된 손흥민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체코 수비진은 전반 내내 손흥민의 침투를 막아내느라 이미 초주검 상태였다. 기술로 제어가 안 되니 거친 보디체킹과 파울로 지탱하던 터였다.
우리가 상대의 뻔한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도 위기를 맞지 않기 위해 점유율 위주의 조심스러운 경기 운영을 하는 동안, 체코 문전에서는 손흥민과 체코 수비수들이 온몸으로 부딪치며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고지대 적응이 더뎠던 체코 선수들의 발이 급격히 무거워진 시점, 비로소 한국 축구가 약속한 기회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결국 이번 승리는 '손흥민 없이 일군 승리'가 아니라, '손흥민의 처절한 희생으로 다져진 승리'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 1인 의존증을 넘어 공격 다변화로 가야 한다
경기 후 일각에서는 손흥민의 영향력에 대한 무용론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질문을 뒤집어보면 답은 명확해진다. 손흥민이 없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무게감이 어떠할지 상상해 보라. 당장 상대 팀들은 한국을 만날 때 전력분석의 절반 이상을 '손흥민 봉쇄'에 투자한다. 그가 없다면 체코가 우리를 두려워했을까. 다음 상대인 멕시코가 우리를 신경이나 쓰겠는가.
개인적으로 이번 체코전의 아쉬움을 굳이 꼽자면 선발 라인업과 포메이션이었다. 최전방에 손흥민 한 명만 외롭게 배치한 구조는 다채로운 골을 기대하기 힘든 경직된 형태였다. 만약 손흥민과 오현규를 투톱으로 세워 시너지를 냈다면 그 파괴력이 어땠을지 진한 호기심이 남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재성이나 백승호 등 핵심 미드필더 중 한 명을 제외해야 하는 전술적 고민은 따랐을 것이다. 스리백을 사용하다 보니 중원 조합의 선택지가 좁아진 탓이다. 결과적으로 체코의 고공 폭격을 의식한 수비 중심의 안정적 전술이 극적인 역전승으로 이어졌기에 좋은 결과를 탓할 수는 없다. 항상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하는 것이 축구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현규를 정통 9번으로 세우고 손흥민에게 섀도우 스트라이커로서 프리롤을 부여했다면, 체코의 수비 균열은 훨씬 일찍 시작되었을 것이고 경기는 더 수월하게 풀렸을 것이라는 진단도 가능하다.
숱한 우려와 비판적 여론을 뚤고 어쨌든 값진 첫 승을 일궈낸 만큼, 감독의 선택과 결단 역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2014년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잘 준비했다"던 홍 감독의 말처럼, 본선 첫 단추는 꿰었다. 하지만 대표팀이 짜임새 있는 공수 밸런스를 보여주었느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축구 팬들의 눈높이에는 성에 차지 않는 내용이었다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수비수들 사이에 에이스를 홀로 고립시키는 '1인 의존 축구'의 한계는 감독이 앞으로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다가올 2차전 멕시코전에서는 공격 전술의 다변화와 디테일의 고도화가 이뤄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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