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박호윤 전문기자] 골프를 관심 있게 지켜 보다 보면 가끔 통계가 소설보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필자가 발견한 것도 그런 사례다. 현재 남녀 골프 세계랭킹 1위인 스코티 셰플러와 넬리 코다의 이야기다.
셰플러는 최근 4년 연속 PGA투어 올해의 선수에 뽑혔을 만큼 압도적 기량을 과시하고 있다. 2024년 7승, 지난해 6승을 거두며 사실상 남자 골프계를 지배해 왔다. 올 시즌에는 아직 1승에 머물고 있지만 상금(1,204만3,693달러), 페덱스컵 포인트(2,811점), 평균 타수(69.168타) 등 주요 지표에서 모두 1위를 달리고 있다. 시즌 3승의 맷 피츠패트릭도, 더 플레이어스챔피언십 포함 2승을 올린 캐머런 영도 셰플러 아래다. 우승 숫자만 다소 적을 뿐 여전히 가장 강력한 존재다.
코다는 한술 더 떠 경이롭기까지 하다. 올 시즌 초반 우승-준우승-준우승-준우승-우승-우승을 기록하며 6개 대회 연속 ‘TOP2’에 이름을 올렸다. 아니카 소렌스탐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하는 행보다. 올해 열린 두 차례 메이저대회도 모두 석권했다. 8개 대회에 출전해 우승 4회, 준우승 3회, 전 경기 톱10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내고 있다.
#우연을 넘어선 데칼코마니...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저 남녀 세계랭킹 1위가 나란히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는 정도로 생각했다. 서른 또는 서른을 목전에 둔 인생의 절정기에서 당분간 세계를 지배할 절대 강자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것저것 둘을 비교해 보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쯤은 우연일 수 있다. 두세 개까지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계속 숫자가 겹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선 우승 횟수다. 셰플러는 PGA투어 통산 20승, 코다는 LPGA투어 통산 19승을 기록 중이다. 메이저 우승은 나란히 4승씩이다. 올림픽 금메달도 각각 하나씩 보유하고 있다. 셰플러는 파리올림픽에서, 코다는 도쿄올림픽에서 각각 정상에 올랐다.
생애 통산 상금 순위 역시 똑같이 역대 3위다. 셰플러는 타이거 우즈와 로리 맥길로이에 이어 세 번째, 코다는 아니카 소렌스탐과 리디아 고 다음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들은 2024년 시즌 나란히 투어 7승씩을 기록했다. 단일 시즌 7승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숫자가 아니다. 세계랭킹 1위라고 해서 쉽게 달성할 수 있는 승수도 아니다. 그런데 같은 해 남녀 투어 최고의 선수들이 똑같이 7승을 올렸다.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나란히 현실화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통산 톱10 진입 횟수다. 셰플러는 지금까지 162개 대회에 출전해 83차례 톱10에 들었다. 출전 대회의 절반이 넘는다. 그렇다면 코다는 어떨까. 역시 83회다. 170개 대회에서 올린 기록이다. 어떤가. 정말 경이롭지 않은가?
여기까지 읽으면 "신기한데?" 정도일 수 있다. 하지만 진짜 흥미로운 부분은 지금부터다.
#전설의 반열로 향하는 길, 그 마지막 퍼즐...커리어 그랜드슬램
현재 두 선수는 똑같은 목표를 향해 큰 걸음을 옮기고 있다. 바로 커리어 그랜드슬램이다.
골프에서 커리어 그랜드슬램은 서로 다른 네 개의 메이저 대회를 모두 우승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업적이다. LPGA투어는 5개의 메이저 가운데 서로 다른 4개 대회를 제패하면 인정한다.

남자 골프에서는 진 사라젠, 벤 호건, 게리 플레이어, 잭 니클라우스, 타이거 우즈, 로리 맥길로이 등 단 6명에게만 허락된 영역이다. 여자 골프 역시 루이스 석스, 미키 라이트, 팻 브래들리, 줄리 잉스터, 캐리 웹, 아니카 소렌스탐, 박인비 등 7명의 전설만이 달성했다.
셰플러에게 남은 마지막 퍼즐은 다음주 열리는 US오픈(6월18~21일)이다. 마스터스(2022, 2024년)와 PGA챔피언십, 디 오픈(이상 2025년)을 이미 제패한 그는 이제 US오픈 트로피만 들어 올리면 골프 역사상 일곱 번째 커리어 그랜드슬래머가 된다.
코다 역시 마지막 한 조각만 남겨 두고 있다. 2021년 KPMG위민스PGA챔피언십에서 첫 메이저 타이틀을 차지한 그는 2024년과 올해 셰브론 챔피언십을 거푸 제패했고, 최근 US여자오픈 우승으로 숙원 하나를 풀어냈다. 이제 7월 중 열리는 에비앙 챔피언십과 AIG 여자오픈 가운데 하나만 우승하면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완성한다.
특별히 기대가 부풀려 지고 있는 것은 둘 다 단순한 도전자가 아니라 가장 유력한 후보라는 점이다. 셰플러는 최근 몇 년간 남자 골프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 코다 역시 올해 셰브론 챔피언십과 US여자오픈을 잇달아 제패하며 여자 골프 최강자의 위엄을 과시하고 있다.

#'신'이 짠 각본?...US오픈 최종일은 셰플러의 서른 번째 생일
그런데 여기에 골프의 신이 정교하게 각본을 짠 듯한 짜릿한 타이밍이 더해진다. 올해 US 오픈 최종 라운드가 열리는 6월 21일은 바로 셰플러의 서른 번째 생일이다. 만약 그날 그가 챔피언 퍼트를 떨군다면, 인생의 가장 찬란한 황금기인 ‘서른’이 되는 당일에 커리어 그랜드슬램이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생일 선물을 스스로에게 선사하게 된다.
물론 스포츠는 동화가 아니다. 예정된 결말도 없다. 로리 맥길로이는 마지막 퍼즐인 마스터스를 완성하기까지 10년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조던 스피스는 아직도 10년 가까이 마지막 한 조각을 찾고 있다. 커리어 그랜드슬램은 위대한 선수라고 해서 쉽게 허락되는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남녀 세계랭킹 1위, 통산 우승 20승과 19승, 메이저 4승과 4승, 올림픽 금메달 1개씩, 생애 투어 상금 역대 3위, 통산 톱10 83회, 같은 시즌 7승, 그리고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향한 마지막 도전까지.
마주 보고 있는 듯한 두 명의 독보적 챔피언이 같은 시기에 같은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 정도면 단순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닮아 있다. 남녀 세계랭킹 1위가 같은 시대에, 같은 속도로,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은 골프 역사를 통틀어서도 찾아 보기 쉽지 않다.
어쩌면 훗날 우리는 2026년을 셰플러와 코다의 해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골프가 만들어 낸 가장 흥미로운 평행이론 하나가 지금 현재 진행형으로 쓰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