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리뷰] 웃기다가 씁쓸하다가…'바냐 삼촌'이 건네는 위로
  • 박지윤 기자
  • 입력: 2026.05.23 00:00 / 수정: 2026.05.23 00:00
이서진·고아성, 나란히 첫 연극 도전
31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에서 공연
바냐 삼촌은 평생을 삶의 터전과 가족 그 안의 질서에 헌신해 온 바냐와 소냐를 비롯해 어느 순간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며 삶 전체가 흔들리는 평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LG아트센터
'바냐 삼촌'은 평생을 삶의 터전과 가족 그 안의 질서에 헌신해 온 바냐와 소냐를 비롯해 어느 순간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며 삶 전체가 흔들리는 평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LG아트센터

[더팩트|박지윤 기자] 어렵고 복잡할 줄 알았는데 쉽게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었다. 의외로 곳곳에 많이 녹아든 웃음 포인트로 유쾌함도 잡았다. 고전을 동시대의 언어로 풀어내면서 평범한 것 같지만 각자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서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모든 바냐들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바냐 삼촌'이다.

1899년 초연된 '바냐 삼촌'은 지금까지도 세계 무대에서 꾸준히 공연되는 안톤 체호프의 대표작으로, 평생을 삶의 터전과 가족 그 안의 질서에 헌신해 온 바냐와 소냐를 비롯해 어느 순간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며 삶 전체가 흔들리는 평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바냐는 조카 소냐와 함께 시골의 한 영지를 관리하며 죽은 여동생의 남편이자 소냐의 아빠인 세레브랴코프 교수의 성공을 위해 수입을 갖다 바치고 있다. 평온하다고만 생각했던 바냐와 가족들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은퇴한 교수가 젊고 아름다운 두 번째 아내 엘레나와 함께 영지로 돌아오면서부터다. 엘레나는 바냐가 젊은 시절 연심을 품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소냐는 통풍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교수를 진찰하기 위해 집으로 오는 의사 아스트로프를 향한 마음을 자극하는데 의사의 마음은 엘레나에게 향해 있고 두 사람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다.

이서진은 삶에 불만과 회의를 토해내면서도 가족에 대한 애정과 꿈과 관련된 순정을 간직한 주인공 바냐 역을, 고아성은 바냐와 함께 삶의 터전을 지키며 다음 세대를 향해 나아가는 소냐 역을 맡아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LG아트센터
이서진은 삶에 불만과 회의를 토해내면서도 가족에 대한 애정과 꿈과 관련된 순정을 간직한 주인공 바냐 역을, 고아성은 바냐와 함께 삶의 터전을 지키며 다음 세대를 향해 나아가는 소냐 역을 맡아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LG아트센터

이루지 못한 사랑부터 어긋난 욕망과 뒤늦은 후회가 얽히고설킨 가운데, 세레브랴코프는 가족들에게 돌연 영지를 처분하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그동안 자신의 삶을 바쳐서 뒷바라지했던 교수가 무능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바냐는 평생의 헌신이 송두리째 부정당했다는 절망을 느끼면서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분노를 터뜨린다.

원작은 19세기 러시아의 시골 영지를 배경으로 하지만 연극은 특정 시대나 장소에 갇히지 않는다. 첫 대극장 연출을 맡은 손상규는 안톤 체호프의 텍스트에 오늘날의 감정과 언어를 불어넣고 다정함을 한 스푼 추가하며 현재의 관객들도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즐길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 이번 작품은 각각 바냐와 소냐로 분해 삼촌과 조카로 무대에 오르고 있는 이서진과 고아성의 첫 연극 도전으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

그동안 여러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현실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투덜대고 틱틱대면서도 할 일은 묵묵히 했던 이서진의 실제 모습이 바냐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 보다 더 입체적인 인물로서 존재한다. 또 그는 삶에 불만과 회의를 품으면서도 가족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 캐릭터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과하지 않게 그려낸다. 과거의 일과 현재의 감정을 빠르게 내뱉는 독백 장면에서도 남다른 에너지와 빠른 속도감으로 관객들의 집중력을 팽팽하게 붙든다.

바냐와 함께 삶의 터전을 지키면서 다음 세대를 향해 나아가는 소냐가 된 고아성은 안정적인 연기력과 특유의 사랑스러움을 바탕으로 인물의 감정 변화를 밀도 있게 쌓아 올린다. 특히 소냐로서 바냐에게 전하는 현실적인 위로를 담담하면서도 울림 있게 읊조리는 그의 톤은 고요한 분위기와 어우러지며 짙은 여운을 선사한다. 여기에 과하지 않은 조명과 최소한의 음악은 배우들의 감정과 대사에 더 집중하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된다.

바냐 삼촌은 오는 31일까지 전 배역 원 캐스트로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에서 공연된다. /LG아트센터
'바냐 삼촌'은 오는 31일까지 전 배역 원 캐스트로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에서 공연된다. /LG아트센터

세상을 떠난 여동생의 남편의 새 부인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주인공부터 조카가 짝사랑하는 아버지의 주치의는 새엄마와 입을 맞추는가 하면 주인공과 주치의는 친구 사이인, 글로 나열하니 더 말이 안 되는 관계성이다. 이를 내보이며 시작부터 흥미를 자극하던 공연은 삶의 허무와 관계의 균열 그리고 무너지는 일상 속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다루면서 위태롭지만 버텨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괜찮다고 어루만진다.

고전이라 무겁고 어렵게만 풀어낼 거라는 기자의 예상과 달리 "기댈 곳이 없다"는 엘레나를 벽에 기대게 하는 등 곳곳에 예측할 수 없는 유머도 묻어 있어 마냥 무겁고 진지하게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도 색다르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아 연극이나 고전과 거리가 먼 관객들이 쉽게 입문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의 삶은 무척이나 괴로웠지만 죽은 뒤에서야 알게 되겠지. 우리의 생이 사실은 얼마나 눈부셨는지'라고 바냐를 위로하는 소냐의 대사는 오랫동안 마음에 머무른다.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것 같은 나날도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다는 걸 다시금 되새기게 하면서 말이다.

TV나 스크린에서만 보던 이서진과 고아성의 생생한 에너지와 작품의 메시지가 만나 울림과 위로를 건네는 '바냐 삼촌'은 오는 31일까지 전 배역 원 캐스트로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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