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탄 입술 위 덧바른 '진심', 윤정환의 ‘마음 빌드업' [이영규의 비욘더매치]
  • 이영규 기자
  • 입력: 2026.04.24 00:00 / 수정: 2026.04.24 00:00
입술을 적시는 초조함, 마음을 적시는 리더십
‘사람’을 향한 빌드업, 비주류의 역습은 이제 시작이다
인맥의 벽을 넘어 ‘야전침대’ 전술로 리더십을 증명하고 있는 인천유나이티드FC의 윤정환 감독/ K리그
'인맥의 벽'을 넘어 ‘야전침대’ 전술로 리더십을 증명하고 있는 인천유나이티드FC의 윤정환 감독/ K리그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경기 초반 0-1로 끌려가던 시간, 벤치의 윤정환 감독은 연방 립밤을 덧발랐다. 겉으로는 평온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하얗게 타들어 가는 입술은 숨길 수 없는 현장의 압박감을 드러낸다. 불과 며칠 전 부천과의 경기에서 전반 2-0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허용한 무승부의 잔상이 머릿속을 스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숙인 선수들에게 추궁의 독설 대신 "할 수 있다"는 격려를 건넸다. 내성적이고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가 선택한 ‘윤정환식 빌드업’은 전술 이전에 사람의 마음부터 다시 쌓아 올리는 것이었다.

인천유나이티드 선수들이 21일 전북현대전이 끝난 뒤 그라운드에 지쳐 쓰러져있다./ 전주=K리그
인천유나이티드 선수들이 21일 전북현대전이 끝난 뒤 그라운드에 지쳐 쓰러져있다./ 전주=K리그

◆전술가의 혜안: 11년의 징크스를 깨고 '뒷문'을 걸어 잠그다

전반 이명주의 동점골과 후반 이동률의 역전골로 경기를 뒤집고 추가시간 8분을 버티는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인천 선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라운드에 주저앉았다. 젖먹던 힘까지 다 쏟아부어 전북의 파상공세를 막아낸 참이다. 윤정환 감독은 그제야 두 손을 불끈 쥐며 코치진과 기쁨의 포옹을 나눴다. 2-1 역전승.

지난 21일 원정경기로 치른 K리그의 강자 전북 현대전. 선수층이 두껍지 않은 상황에서 3일 간격의 강행군이었고, 무엇보다 지난 11년간 ‘전주성’에서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징크스가 어깨를 눌렀다. 하지만 이 역전승의 이면에는 치밀한 계산이 있었다. 지난 부천전에서 다잡은 승리를 막판에 놓친 윤 감독은 이번 경기에서 어떻게든 팀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인천은 K리그1 승격 첫 시즌 유독 경기 막판 실점으로 승점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뒷문' 불안이라는 고질병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더 높은 곳으로의 도약이 불가능해 보였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가 던진 승부수는 백전노장 이청용의 선발 투톱 기용과 풀타임 소화였다.

중원의 무게감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전방 압박이 심한 현대 축구에서 공을 지켜내고 활로를 여는 ‘볼 키핑’ 능력이 승부의 분수령임을 간파했다. 여기에 골키퍼 이태희의 안정감이 더해지며 전방의 노련함과 후방의 단단함이 조화를 이뤘다. 이는 단순히 유행하는 전술 트렌드에 매몰되지 않고, 현재 우리 팀의 결핍이 무엇인지 정확히 읽어낸 노련한 전략가의 승리였다.

윤정환 감독 체제에서 공격수로 활약하고 있는 이청용./K리그
윤정환 감독 체제에서 공격수로 활약하고 있는 이청용./K리그

◆‘비주류’ 아웃사이더가 감내해야 했던 고독한 시간

그는 현역 시절 ‘니폼니시 축구의 황태자’로 불린 화려한 스타였다. 그러나 한국 축구의 이른바 ‘성골 인맥’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류 대학 출신이 아니라는 한계와 내성적인 성격 탓에 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인 ‘아웃사이더’였다. 지도자 생활도 일본에서 시작해야 했다. 2011년 감독 첫해 J2리그 사간도스를 J1으로 승격시키고 2014년 결별 당시 팀을 리그 1위까지 이끌며 일본에서는 명망 있는 지도자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9년 만에 돌아온 고국은 차가웠다. 연·고대 출신이 주류였던 울산 현대의 역사상 첫 지방대 출신 감독이 된 그에게 돌아온 것은 경원시와 근거 없는 소문이었다. "누군가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뜨려 놨더라"는 그의 회고처럼, 선수들이 등을 돌린 상태에서 그가 추구하는 축구를 펼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2년 만에 지휘봉을 내려놓으면서도 그는 "울산의 재도약을 위한 씨앗을 뿌린 시간이었다"며 담담히 상처를 삼켰다.

인천유나이티드FC 축구센터에서 팀훈련을 준비 중인 윤정환 감독./이영규 전문기자
인천유나이티드FC 축구센터에서 팀훈련을 준비 중인 윤정환 감독./이영규 전문기자

◆일본이 추앙하고 한국이 외면한 전술가

그는 일본 축구와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뛰어난 일본어 실력과 선수와의 1대1 대담을 중시하는 섬세한 소통 능력 덕분이다. 울산을 떠나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J1 승격팀 세레소 오사카를 이끌고 정규 리그 3위와 ACL(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확정 지었던 호성적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사간도스 시절부터 패스 플레이를 중시하며 상대 진영을 파고들었던 그의 축구는 지금의 ‘빌드업 트렌드’를 앞서간 것이었다.

다시 고국에 돌아와 강원FC를 강등 위기에서 구해내고 준우승까지 이끌고도 재계약에 실패했던 ‘웃픈’ 주인공. 그리고 다시 2부 리그로 내려간 인천의 지휘봉을 잡아 1년 만에 승격을 일궈낸 여정은 그가 가진 빌드업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히 공을 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을 부정하는 시스템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한 땀 한 땀 증명해 온 고독한 투쟁이었다.

인천유나이티드 선수들이 론도게임(볼돌리기)게임을 통해 패스 감각을 키우고 있다./인천=이영규 전문기자
인천유나이티드 선수들이 론도게임(볼돌리기)게임을 통해 패스 감각을 키우고 있다./인천=이영규 전문기자

◆이제 우리가 윤정환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이날 전북전 후반 13분에 터진 역전골은 이동률의 1부 리그 마수걸이 골이기도 했다. K리그2 이랜드에서 세 시즌을 보낸 뒤 지난해 인천에 둥지를 튼 그의 가능성을 알아본 건 윤 감독이었다. 이동률은 "감독님이 경기 전 조언과 선수들 분위기를 북돋아 주신 덕분"이라며 공을 돌렸다.

실제로 윤 감독은 선수들과 격의 없이 웃고 소통한다. 유공 시절 니폼니시 감독과 조윤환 감독에게 배운 지도 철학이다. 대화를 통해 의견을 듣고 방향을 제시하는 이 방식은, 과거 울산에서 소통의 벽에 가로막혔던 그가 찾아낸 해답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차기 대표팀 감독 후보군으로 거론되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인맥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온 윤정환. 하지만 그는 이제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는다. 감독실의 야전침대에서 밤새 유럽의 전술을 연구하고, 훈련장에서는 선수들과 함께 론도(Rondo, 볼 돌리기) 게임에 직접 참여해 패자에게 커피를 쏘게 하며 선수들의 웃음을 이끌어낼 뿐이다.

타들어 가는 입술을 립밤으로 달래며, 그는 오늘도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가장 견고한 축구를 빌드업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 한국 축구에 필요한 것은 화려한 수사학보다, 묵묵히 야전침대 위에서 전술을 고민하는 이 ‘외로운 전략가’의 진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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