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박호윤 전문기자] 김시우(31·CJ)가 3년 넘게 막혀 있는 ‘혈로’를 시원하게 뚫어 줄 수 있을 것인가. 김시우는 20일 막을 내린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시그니처 이벤트인 RBC 헤리티지(총상금 2000만 달러)에서 단독 3위에 올라 완연한 상승세를 보였다. 덩달아 우승 갈증에 시달리는 팬들의 기대와 바람도 커지고 있다.
#3년3개월의 우승 가뭄...깊어지는 팬들의 갈증
2020~2022년 시즌을 즈음해 김시우, 임성재, 이경훈, 김주형 등이 돌아가며 심심찮게 울려 주던 PGA투어 승전보가 끊긴 지 3년 하고도 3개월이 지났다. 2023년 1월, 김시우가 소니오픈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것이 그 마지막 장면이다.
사실 PGA투어에서 한국 남자골프의 위상은 그 어느 때 보다 높다. 최경주가 개척하고, 양용은이 넓힌 그 길 위에서 김시우, 임성재, 김주형 등 소위 ‘젊은 피’들이 선배들 보다 더 강한 경쟁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년간, 이들은 적지 않은 우승 기회를 만들고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우승 문턱을 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궈야 했고 길어지는 무관의 침묵 속에 팬들의 갈증도 깊어 가고 있다.
여기다 PGA투어 통산 상금 2천만달러를 훌쩍 넘기며 꾸준히 정상권의 활약을 펼쳤던 ‘맏형’ 안병훈이 끝내 우승이라는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LIV골프로 이적한 것은 PGA투어 우승이 얼마나 바늘구멍 통과 만큼이나 어려운 일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올들어 김시우가 전에 없는 안정감으로 자주 상위권에 오름으로써 조만간 한국 남자골프의 우승 가뭄을 해소시켜 줄 것으로 기대 를 모으고 있다. 특히 최근 끝난 ‘시그니처 이벤트’ RBC헤리티지에서 당당 3위에 오른 것은 장기간의 정체를 끊어 낼 가장 확실한 신호탄으로 읽히는 장면이다.
이 대회에서 김시우는 우승자이자 세계 랭킹 3위에 오른 매튜 피츠패트릭, 당대 최고수로 평가되고 있는 스코티 셰플러와 막판까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최근 김시우의 상승세는 일시적인 흐름이 아니다. 올들어 참가한 11개 대회에서 모두 컷오프를 통과했을 뿐 아니라 절반에 가까운 5차례나 톱10을 기록했고, 더욱이 톱3 안에 든 것도 이번까지 벌써 세번째다.
시즌 첫 출전 대회였던 소니오픈에서 공동 11위에 올라 무난한 출발을 보였던 김시우는 이어 벌어진 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서 결과적으로는 공동 6위로 마무리됐지만 최종 라운드를 단독 선두로 출발하는 등 우승권에 근접한 모습을 과시했다. 또한 파머스 인슈어런스와 WM피닉스오픈에서도 공동 2위, 공동 3위라는 호성적을 잇달아 작성하는 등 ‘뜨거운 1, 2월’을 보냈다. 이후에도 상위권은 아니더라도 한차례의 미스컷도 없이 페이스를 유지한 김시우는 이번 RBC헤리티지에서 다시 한번 정상이 멀지 않았다는 자신감을 확인했다.
#'롤러코스터형'에서 '지속형'으로...경기 운영의 변화
무엇이 달라졌을까.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경기 운영이다. 한 때 김시우는 공격성과 기복이 공존하는 선수였다. 즉 공격적인 플레이로 버디도 많지만 보기나 더블보기도 많은 ‘롤러코스터형’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보기 회피(Bogey Avoidance) 부문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김시우의 골프는 ‘잃지 않는 게임’으로 진화했다.
무리한 승부 대신 흐름을 유지하는 선택, 파를 지켜내는 안정감,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힘을 집중하는 절제가 몸에 스며 들었다. 김시우는 자신의 에이전트사인 플레이앤웍스를 통해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좋아졌다. 흐름이 나빠도 크게 무너지지 않고, 최대한 점수를 지키는 쪽으로 플레이하려 한다"고 말하고 "특히 무리한 플레이를 줄이는 대신 상황에 맞게 선택하는 것들이 쌓이면서 기복없는 플레이를 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골프 스타일이 ‘폭발형’에서 ‘지속형’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뜻이다. 경험이 쌓이면서 체득한 자연스런 변화다.

#필드 위의 든든한 '빽'...가족이 선물한 베테랑의 여유
여기에 더해 가족이라는 단단한 버팀목이 김시우의 가장 든든한 ‘빽’이다. 골프는 멘탈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종목이다. 김시우의 안정감 뒤에는 KLPGA투어 7승 경력의 오지현 프로와의 결혼, 그리고 첫 아이의 탄생이 정서적 안정과 함께 필드에서의 여유를 선물했다.
가능하면 함께 투어 생활을 하고 있는 가족들의 위로와 격려는 샷 하나에 일희일비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던 모습 대신 실수를 덤덤히 받아들이고 다음을 차분히 준비하는 베테랑다움으로 변모시켰다. 프로 출신 아내는 김시우의 가장 든든한 조언자이자 코치다.
연습장에서 아내의 조언을 들으며 템포를 조절하는 김시우의 모습은 PGA투어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부러움의 대상인 것으로 전해진다. 김시우 스스로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부분이 좋아진 듯하다. 안좋을 때도 최대한 버티면서 다음 기회를 기다리려고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승이 없다는 사실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평균타수 70.206으로 전체 13위에 올라 있고 샷 이득타수(Tee-to-Green)는 셰플러 보다도 앞선 4위, 드라이버 샷 정확도와 아이언의 정교함은 정상권의 수치를 보이고 있어 데이터 상으로는 이미 우승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퍼트 지표가 여전히 중하위권에 있어 필요할 때 터져주는 ‘그린 위에서의 마지막 한방’이 부족한 상태다. 김시우는 몇 차례 기회를 놓친데 대해 "많은 아쉬움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만큼 좋은 위치에서 경쟁을 했다는 의미이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최종 라운드에서는 작은 차이가 결정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조금 더 집중해서 플레이할 생각"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26번째 승전보를 향해...그린 위의 마지막 한방
현재까지 한국 선수가 PGA투어에서 일궈낸 승수는 총 9명이 합작한 25승이다. 최경주의 8승을 필두로 양용은의 메이저 제패(PGA챔피언십) 포함 2승, 그리고 김시우가 플레이어스챔피언십 우승 등 4승으로 그 뒤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다. 김주형이 3승, 배상문, 이경훈, 임성재 등이 2승씩을 보탰다.
세계 랭킹 26위, 페덱스컵 포인트 10위로 커리어 하이를 찍고 있는 김시우. 그는 지금 한국의 26번째 우승이라는 문턱 가장 가까이에 서 있다. 안정감과 경험, 그리고 자신감 까지 더해진 상태다. 임성재의 꾸준함과 김주형의 패기 사이에서 묵묵히 제2의 전성기를 개척해 가고 있는 김시우가 멀지 않은 시간에 3년 여의 무관 시절을 끝내고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면 이는 단순한 개인의 영광을 넘어 주춤했던 한국 남자골프 전체의 사기를 올리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막힌 혈로는 어느 순간 스스로 뚫리지 않는다. 결정적인 시원한 한방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먼저 문을 열어 줘야 하고, 그 가장 가까이에 김시우가 서 있다.
(김시우는 이번 주 2인1조 팀경기로 치러지는 취리히클래식은 건너 뛰고 다음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소유의 마이애미 트럼프 내셔널 도랄에서 열리는 캐딜락챔피언십에서 다시 정상에 도전한다. 이 대회는 올해 새로 만들어진 시그니처 대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