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박지윤 기자] 승리의 기록에 가려졌던 역사의 빈틈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채우며 그동안 모르고 지나쳤으나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가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믿고 보는 배우들의 대체 불가한 연기와 빈틈없는 앙상블로 말이다. 또 한 편의 웰메이드 사극 영화가 될, 극장에서 봐야 할 이유가 충분한 '왕과 사는 남자'다.
오는 2월 4일 개봉하는 '왕과 사는 남자'(감독 장항준)는 1457년 청령포,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과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어린 선왕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한국 영화 최초로 단종의 숨겨진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계유정난이 조선을 뒤흔들고 어린 왕 이홍위(박지훈 분)는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길에 오른다. 이때 강원도 영월 산골 마을 광천골의 촌장 엄흥도(유해진 분)는 노루골의 촌장(안재홍 분)으로부터 유배온 양반 덕분에 마을 전체가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끼니 걱정을 해결하기 위해 광천골을 유배지로 만들기로 한다.
하지만 엄흥도가 부푼 꿈으로 맞이한 이는 왕위에서 쫓겨난 이홍위였다. 유배지를 지키는 보수주인으로서 이홍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만 하는 엄흥도는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식음 전폐한 그가 신경 쓰인다.
그러던 어느 날, 절벽에서 뛰어내리려던 이홍위를 구한 엄흥도는 그와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인간적으로 마음을 열며 점점 변화하게 된다.

조선 제6대 왕 단종 이홍위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돼 17세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왕이다.
첫 사극에 도전한 장항준 감독은 실록에 적힌 '노산군이 돌아가셨을 때 엄흥도가 슬퍼하며 곡을 하고 시신을 수습했다. 그리고 숨어 살았다'라는 두 줄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탄생시킨 엄흥도라는 인물의 시선으로 태어나 단 한 번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본 적 없는 단종의 또 다른 시간을 신선하고 색다르게 조명한다.
그동안 다뤄지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역사가 곧 스포인 작품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다 아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재밌고도 먹먹하게 끝까지 즐길 수 있는 이유는 배우들의 믿고 보는 열연 덕분이다.
먼저 유해진은 초반 스토리텔러로서 대사를 쉴 새 없이 빠르고도 정확하게 내뱉으며 자칫 무겁게만 흘러갈 수 있는 작품에 유쾌함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그는 관객들의 웃음을 책임지다가도 이홍위를 바라보는 엄흥도의 시선 변화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슬픔과 감동을 동시에 자아낸다. 국사책을 찢고 나온 비주얼과 현실에 발 딛고 있는 안정적인 연기는 보는 이들을 단숨에 그 시대로 초대하며 몰입도를 한껏 끌어올린다.
박지훈은 깊은 눈빛만으로 선배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발산한다. 그는 충신들이 역모죄로 죽임을 당하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삶의 의지를 잃은 아이의 무기력함부터 유배지에서 엄흥도를 만나 동고동락하며 백성을 생각하는 군주로서의 강인함까지, 인물의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내며 단종 그 자체로 존재한다. '약한영웅' 시리즈에서 연시은 역을 맡아 배우로서 입지를 견고하게 다진 박지훈은 이렇게 또 하나의 대표작이자 인생캐를 탄생시켰다.

유지태는 대중에게 익숙한 기존의 왜소하고 간소한 이미지의 한명회를 정반대로 그려내며 분노와 긴장감을 동시에 유발한다. 그는 남다른 풍채와 날카로운 눈빛, 모두를 압도하는 걸음걸이 등으로 당대 최고의 권력자다운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이홍위의 곁을 끝까지 지키는 궁녀 매화로 분한 전미도는 유해진과는 티켝태격 케미를 형성하면서 웃음을 유발하고, 박지훈을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으로 인물의 강인함과 포근함을 드러내며 안정적인 활약을 펼친다. 여기에 이준혁 안재홍 박지환 정진운 등도 캐릭터를 찰떡같이 소화하며 짧고 극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다만 유해진이 발 딛고 있는 사람 냄새 나는 광천골과 한명회가 중심이 되는 피바람 부는 한양이 극과 극의 온도차를 지니고 있는 만큼, 이야기가 다소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한다는 점과 등장의 이유는 알겠지만 몰입도를 깨는 호랑이 CG의 퀄리티 등은 다소 아쉽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승리의 기록 그 이면에 있는 실현되지 못한 정의의 뒷모습이라는, 그동안 잘 몰랐지만 모두가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가 믿고 보는 배우들의 완벽한 앙상블로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는 점은 극장에서 영화를 볼 이유가 충분하다.
성공한 역모는 박수받고 실패한 정의는 잊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반추하는, 재미와 의미를 다 잡은 '왕과 사는 남자'가 침체된 한국 영화계에 활력을 제대로 불어넣을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된다. 12세 이상 관람가이며 러닝타임은 117분이다.
jiyoon-1031@tf.co.kr
[연예부 | ssent@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