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조채원 기자] 정부가 국립국제교육원이 추진하는 한국어능력시험(TOPIK) 디지털 전환 기본계획 수정 시안을 내놨다. 현장 전문가들은 학습자 특성과 국가별 인프라 격차를 고려해 응시 방식과 도입 속도를 세심하게 설계할 것을 주문했다.
교육부와 국립국제교육원은 2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TOPIK 디지털 전환 공청회를 열고 기본계획 수정 시안을 공개했다. TOPIK은 재외동포와 외국인의 한국어 사용 능력을 평가해 학습 방향을 제시하는 시험으로 국내 대학 진학과 졸업, 취업, 비자 취득 등에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K-콘텐츠 확산과 함께 한국어 학습 수요가 늘면서 TOPIK 지원자는 2017년 29만638명에서 2025년 56만6665명으로, 2배 가량 증가했다. 시험이 시행되는 국가 수도 같은 기간 70개국에서 89개국으로 확대됐다.
국제적 활용도와 응시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지만 TOPIK은 여전히 종이시험(PBT) 중심이다. 정부는 언제 어디서나 편리하게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디지털 평가 체제를 구축하겠다며 2023년 민간 주도의 한국어능력시험 디지털 전환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민간 주도 시험 운영은 시험의 공공성을 훼손하고 공신력을 떨어뜨릴 수 있고 교육 생태계가 특정 기업에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고, 학계와 현장 전문가를 중심으로 강한 비판이 이어졌다.
이번에 발표된 수정 시안 주요 내용은 민간 주도 방식이던 사업 구조를 정부 주도의 공공 소프트웨어 사업 형태로 전환하는 것이다. 늘어나는 시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인공지능(AI) 기반 스마트 문제은행과 지능형 자동채점 시스템을 도입하고, 기초 단계 시험에는 홈테스트 방식을 적용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현재 운영 중인 인터넷 기반 시험(IBT)의 시험장을 확대해 응시자의 접근성과 편의성을 높이고, 신규 시행 기관에 대한 운영 지원과 관리도 강화하기로 했다.
국립국제교육원은 2026년 디지털 평가 플랫폼 구축, 정책 연구 연구 예산 확보 등 정보화전략계획(ISP) 수립을 준비할 방침이다. 내년도에는 문제은행, 자동 채점 시스템 개발 준비를 위한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전문가 협의회도 추진하겠다고 했다.

공청회에서는 디지털 전환의 속도와 방식을 두고 신중론이 잇따랐다. 심혜령 배재대학교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는 "입학·유학 자격을 판단하는 토플은 1964년 PBT가 시작돼 1998년 컴퓨터 기반 시험(CBT), 2005년 IBT가 도입됐다"며 "디지털화의 글로벌 요구와 목적성이 아주 뚜렷한 언어인 영어조차 수십년에 걸쳐 이뤄졌다"고 말했다. "학습 견인, 정주 지원이라는 아주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TOPIK은 토플과 비교해봤을때 디지털 전환을 더욱 점진적으로, 장기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심 교수는 "공공 평가에서의 AI는 인간 판단의 보조적 도구임을 명심해야 한다"며 "출제 시행 채점 사후 관리 전 과정에서 결정 권한과 책임은 철저히 전문가와 공공기관에 귀속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주민 관점에서의 우려도 제기됐다. 석원정 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소장은 "인터넷 인프라가 취약한 국가들의 시험 환경 불안정이 TOPIK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며 "한글 자판 기기 조작 등의 취약한 이주민은 불리한 조건이 형성되고 학습 부담이 가중되는 문제도 있다"고 진단했다. 석 소장은 "응시료 고비용의 문제도 짚지 않을 수 없다"며 "이주민의 한국어 능력이 대한민국 정착이 필수적인 요소가 되고 있는데, TOPIK을 이민 정책의 일환으로 봐야지 효율성과 수익성만으로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최혜영 강원대학교 한국어 교원은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들조차 현재 IBT 시험에 대한 부담을 호소한다"며 "디지털 전환은 굉장히 점차적으로 세분화해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국립국제교육원은 디지털 전환을 속도보다 방향에 방점을 두고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한상신 국립국제교육원장은 "내년을 정보화전략계획(ISP)를 설계하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시작하더라도 어느 특정 해에 전면 시행하겠다는 식으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원장은 "학습자의 한국어 타자 숙련도를 어떻게 높일 것인가도 과제를 두고 있다"며 "공청회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일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