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l 유병철 전문기자] # 1990년생이니 만 35세가 넘었죠. 그런데 현역복서로 생애 가장 큰 상을 받았습니다. OPBF(동양태평양복싱연맹), 예전 복싱팬들이 ‘동양챔피언’이라고 말하던 기구의 ‘2025년 올해의 신인상’입니다. 지난 12월 2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WBC(세계복싱평의회) 총회에서 수상했죠.
만 47세의 매니 파퀴아오가 성공적으로 링에 복귀했고, 전체적으로 직업복서의 은퇴시기가 늦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35세 신인상'은 생경합니다. 한국복싱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두 전설, 장정구(63년생)와 유명우(64년생)는 각각 28세와 29세에 은퇴한 바 있습니다. 은퇴할 나이에 신인상을 받고, 2026년 19년 만에 한국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에 도전하는 김주영(한남체육관)의 스토리를 들어봤습니다. 참고로 한국의 마지막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은 2007년 7월 WBC 페더급 챔피언 벨트를 반납한 지인진입니다.
# 김주영은 중3 때 복싱만화 '더 파이팅'을 보고, "나도 복싱을 하면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복싱글러브를 처음 끼었습니다. 실력이 늘면서 23살에 프로복서로 데뷔했습니다. ‘복싱에 미친 남자’로 불리는 열혈지도자 김한상 관장(한남체육관)과 함께 착실히 성장했죠. 2017년 미들급 한국챔피언(KBC), 2018년 IBF 웰터급 아시아챔피언이 됐습니다. 10연승의 가도를 달렸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고된 훈련과 극심한 감량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료만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생활고까지. 사회에 진출한 또래들이 돈 벌고, 연애하고, 먹고 싶은 것 먹으며 즐기는 삶이 부러웠습니다. 나이도 서른을 넘겼죠. ‘잘해왔는데 왜 포기햐나’는 주변의 만류,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눈물이 날 정도로 아쉬웠지만 버틸 자신이 없었습니다. 여기에 코로나 팬데믹이 터졌습니다. 2020년 8월 은퇴를 결정하고, 김한상 관장의 배려로 한남체육관(현 레거시 복싱짐)을 인수해 ‘관장’으로 삽니다.

# ‘관장’ 김주영은 선수 시절 못해봤던 거 다 해봤습니다. 연애도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 다 만났습니다. 무엇보다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선수시절 70kg을 밑돌던 체중이 90kg까지 급격히 늘었습니다. 다행히 타고난 성실함 덕분에 체육관은 잘 됐습니다. 120명이 넘는 관원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관원이던 동갑내기 여성과 열애를 거쳐 2023년 결혼했습니다.
남부럽지 않은 편안한 삶인데 이상하게 허전했습니다. 선수생활을 접은 게 너무도 아쉬웠던 겁니다. 이를 눈치 챈 아내가 격려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 다시 도전한다면 내가 모든 것을 바쳐서 도울게." 김주영은 2024년 초 김한상 관장을 찾아가 트레이닝을 부탁했습니다. "다시 시작한다면 예전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게 승낙의 조건이었죠.
# 김주영은 2024년 8월, 1464일(4년3일) 만에 링에 복귀했습니다. 기대 이상의 파이팅으로 복귀전에서 승리했고, 이후 3연승을 달렸습니다. 체급도 현역 때보다 낮은 슈퍼라이트급(63.5㎏)으로 고정했습니다. 그만큼 혹독한 훈련을 소화한 겁니다. "나이가 있기에 선수로 더 이상 물어날 곳이 없었죠. 한 번 놀아도 봤고, 그 어느 때보다 선수로 강한 동기부여가 생겼습니다. 복싱을 가르치는 관장이기에 선수로는 스스로 더 엄격해진 겁니다."
이 대목에서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책으로 유명한 장승수 변호사가 떠오릅니다. 공사장 막노동 등 온갖 직업을 거친 그는 뒤늦게 공부에 매달려 고교 졸업 6년 만에 서울대에 수석입학했죠. 제대로 된 늦깎이들이 무서운 이유입니다. 참, 흥미롭게도 장 변호사도 취미 이상으로 복싱을 수련한 바 있습니다. 아, 그리고 김주영은 관원들이 후원자이기도 한데, 배우 소지섭이 5년차 관원으로 이 '현역선수 관장'을 열심히 후원하고 있답니다.

# 말이 그렇지 30대 중반의 나이에 톱복서의 몸을 만드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복귀전을 준비하면서 김주영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을 겪었답니다. "20kg 이상 급격히 감량하기 위해 매우 지친 상태였죠. 매일 새벽 남산을 뛰는데, 그날은 너무 힘들어 땀인지 눈물인지 모르는 무언가가 계속 얼굴을 타고 흘렀습니다. 잠시 쉴까 고민하던 순간, 반대편에서 두 분이 손을 묶은 채 달리는 모습을 봤습니다. 시각장애인 러너 분이 동행인과 훈련을 하는데 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갔습니다. 그 순간 잠시라도 흔들렸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이렇게 예전보다 몸과 기량은 더 좋아졌습니다.
# 4년의 공백을 딛고 복귀한 ‘35세 복서’ 김주영은 2025년 6월 10일 작은 쾌거를 달성합니다. OPBF 및 WBO(세계복싱기구) 아시아태평양 슈퍼라이트급 통합타이틀매치. 장소는 적지인 일본 도쿄의 고라쿠엔홀, 챔피언은 나가타 다이시(당시 세계랭킹 15위)로 이전 4명의 한국선수를 꺾은 ‘한국선수 킬러’였습니다. 판정으로 가면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김주영은 확연히 우세한 경기를 펼치며 2-1 판정승을 거뒀습니다.
OPBF 기준으로 8년 만에 한국의 일본 원정 승리였죠. 이를 인정받아 이번 WBC 총회에서 ‘신인상’을 받은 겁니다. 김주영은 복귀 후 4연승을 더해 현재 한국 현역 프로복서 중 최장인 14연승을 기록 중입니다(통산 20승<11KO> 2패 3무). SBS 스포츠 및 tvN SPORTS 해설위원을 겸하는 KBM의 황현철 대표는 "김주영 선수가 엄청나게 업그레이드됐다."고 높게 평가했습니다.

# 동양챔피언 벨트와 함께 현재 WBC 슈퍼라이트급 19위에 오른 김주영은 내년 1월 서울에서 1차 방어전을 치릅니다. 안방에서 1차 방어에 성공한다면 세계타이틀매치 도전이 가능한 15위 이내 진입이 예상됩니다. 현재 WBC 동급챔피언은 푸에르토리코의 수브리엘 마티아스(33)입니다. 이 체급은 절대강자가 없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호세 라미레스(4차 방어 성공) 이후 5명의 세계챔피언이 2차 방어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죠.
"제 스토리를 아신다면 예상이 될 겁니다. 저는 상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세계챔피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모든 걸 쏟아부어야죠. 존경하는 체육관 선배인 손종오 관장님, 그리고 70의 나이에 제 트레이닝을 담당하고 있는 김한상 관장님, 그리고 제 아내와 관원들을 위해 복서로 부끄럽지 않기 위해 매일 열심히 운동을 합니다." 한국의 김상현, ‘골든보이’ 호야(미국), 멕시코의 복싱영웅 차베스가 거처간 이 체급에서 김주영이 세계챔피언에 오를 수 있을까요? 결과를 떠나 그 묵직한 과정에 응원에 보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