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이우탁 칼럼니스트] 국제정치학 이론에서 패권국(Hegemon)은 국제사회에서 다른 국가를 압도하는 군사.경제.문화적 힘을 가진 국가를 의미한다. 학자들은 패권국의 특징으로 국제질서에 필수적인 공공재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공공재는 세계인이 함께 소비할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를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 전쟁을 막는 글로벌 시스템이나 경제위기 해결과 국제무역 질서및 수송망 보장, 핵무기 확산 방지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오늘날 패권국이라고 하면 당연히 미국을 생각하게 된다. 글로벌 자유무역질서의 구축과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집단 및 상호 방위체제 구축, 글로벌 해상교통로 확보 등은 모두 미국 주도로 이뤄진 것이다. 패권이론에서는 이를 ‘호의적 패권국(Benign hegemon)’으로 부르는데 자국의 패권을 전 세계 대부분 국가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은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세계를 흔들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를 외치면서도 ‘더 이상 세계를 지키는 경찰국가 역할을 못하겠다’고 선언했다. 더 나아가 미국이 지난 수십 년간 무역과 군사 분야에서 다른 나라들에게 부당한 손해를 입었다면서 무차별적인 관세전쟁을 벌이는가 하면 동맹국에 대해서도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 방위비 분담금이라도 더 내라"고 압박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를 ‘착취적 패권국(Explotative hegemon)’으로 부르는데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공공재 사용을 강요하고 비용을 지불토록 하는 패권국을 의미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행보를 미국을 다시 강력한 패권국으로 부활하기 위한 전략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돈과 기술 등 다양한 재화를 미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고도의 계산된 행위라는 것이다.
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공공재 없이 패권국 지위를 유지하려는’ 새로운 패권이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트럼프는 미국이 공공재를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패권국이 아니라 ‘비용을 공유하는’ 패권국이 되겠다는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도 있겠다. 트럼프가 주적으로 상정한 나라는 당연히 ‘패권도전국’ 중국이다. 그는 관세협상에서 거둔 막대한 자금과 동맹국들로부터 갹출한 ‘군사 분담금’을 모두 끌어모아 중국을 반드시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 그리고 동맹국들을 향해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에 동참할지를 강요하고 있다.
최근 한미 양국은 관세협상을 전격 타결했다. 상호관세를 15%로 하기로 한 가운데 한국은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하며, 자동차와 트럭, 농산물 등 대미 교역을 개방하기로 했다. 이제 트럼트의 내밀 청구서에는 경제 뿐 아니라 안보 분야도 망라될 전망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새로운 대중 안보전략이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곧 새 국방전략(NDS)을 공개할 계획인데, 중국의 대만 침공 등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미군의 운용전략이 포함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관심사는 주한미군인데, 전 세계 해외주둔 미군 운용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미국의 전략에 따라 주한미 군의 역할 재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지난달 31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외교장관 회담에서 양국은 "변화하는 역내 안보 및 경제 환경 속에서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전략적 중요성도 한층 높이는 방향으로 동맹을 현대화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큰 틀에서 보면 이번 합의는 트럼프가 추진하는 새로운 패권전략에 한국이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앞으로 한국의 국방비 지출 증액은 물론이고 주한미군의 역할과 성격의 변화, 구체적으로 일부 병력의 철수와 재배치 등이 가시화될 전망이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명분으로 한국전쟁이후 한국의 안보를 지탱해온 주한미군의 성격이 변할 때마다 한국 내부의 논쟁이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8월 중 열릴 한미 정상회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이재명 정부는 ‘미래형 포괄적 한미 동맹’을 내걸고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에 대응하면서 국익을 지키겠다는 각오이지만 중국 견제라는 미묘한 이슈에서 곤혹스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더 큰 틀에서 보면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충돌(Strategic collision)‘의 경과도 예의주시 해야한다. 현 패권국인 미국이 결국 중국을 굴복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주로 서방에서 우세하지만 중국이 일정 정도 현상 변경에 성공해 미중 양국이 적절한 선에서 ’다극화된 국제질서‘를 끌어나갈 것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킨들버거 함정(Kindleberger Trap)'이라는 말이 있다. 1930년대 대공황을 분석한 찰스 킨들버거로부터 시작된 학계 용어인데, 그는 당시 패권국인 영국이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고,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패권국으로서의 능력은 있었으나 의사가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미국은 보호무역주의를 기조로 펼쳐 글로벌 공공재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글로벌 무역이 위축되면서 각국에서 극단주의 세력이 부상해 결국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것이다.
조셉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가 킨들버거 이론을 재조명하고 이를 현재의 국제질서에 적용했다. 당연히 기존 패권국은 미국이고, 도전하는 강대국은 중국을 상정한다. 미중 양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서의 책임보다는 자국의 이익에 몰두할 경우 세계가 다시 함정에 빠질 우려가 크다는 경고를 날린 셈이다. 한반도를 사는 우리도 바짝 정신차리지 않으면 강대국들이 파놓은 패권싸움의 함정에 빠질 우려가 커지는 오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