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 | LA=황덕준 재미 언론인] 박찬호는 은퇴한 지 15년이 됐는데도 여전히 '코리안 특급'이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다. 그라운드를 떠난 뒤에도 야구중계 해설은 물론 이름을 내건 전국리틀야구대회와 유소년캠프를 운영한다. 한국야구위원회(KBO)의 국제홍보위원으로도 활동하며 야구와 관련된 일을 이어오고 있다.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투머치토커(Too-Much-Talker)'라는 '예능용 별명'도 따로 얻고, 심지어 프로골퍼에 도전하는 등 쉴 새없이 활동하는 그를 지켜보면 빅리그 시절 마운드에서 보여준 열정이 여러 갈래로 스펙트럼화된 듯 느껴진다. 최근에는 한국야구의 또 다른 레전드 이승엽이 시즌 도중 사퇴한 두산 베어스의 감독 물망에도 올라 이제 지도자로 입문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나 싶은 참이다.
마침내 그가 마음 속 깊이 감춰뒀던 보다 큰 '꿈'을 향해 발을 내딛는 모양이다. LA 다저스와 계약하며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1994년 이래 빅리그 17년 경력과 은퇴 후 15년을 통틀어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투머치토커'인 그의 입에서 가장 자주 들을 수 있었던 단어는 '꿈'이었을 것이다.
유소년들에게 늘 '꿈'을 말했거니와 류현진이나 김하성 이정후 김혜성에 이르는 후배 빅리거들을 보면서도 자신처럼 '꿈'을 이뤘다고 기뻐했다. 투자금융업계의 소문을 근거로 얼마 전 한국의 미디어가 전한 박찬호 관련 소식은 '코리안 특급'이 달려온 꿈의 종착역이 어딘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박찬호의 현역시절 백넘버를 붙여 그가 설립한 법인 '팀61'을 중심으로 7천만 달러(한화 약 963억원) 규모의 펀드가 조성돼 메이저리그 구단 애슬레틱스에 투자할 것이라는 뉴스는 그야말로 뜨거운 화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박찬호와 함께 방탄소년단(BTS)의 멤버 슈가를 비롯, 재계순위 54위인 삼천리그룹 이만득 회장이 펀드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인동포사회도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월스트리트에서 한인동포로서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로 꼽히는 마이크 주 뱅크오브 아메리카 글로벌 기업투자금융 담당 최고운영책임자(COO)와 수십억 달러(한화 수조원)의 자산을 움직이는 의료그룹 어센드 파트너스의 공동대표 황인선 씨가 박찬호의 투자펀드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마이크 주는 미국의 투자·금융·재정 분야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전문가들의 멘토로 불린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대학교수였던 부친을 따라 7살에 미국에 이민, 한국인이 많지 않은 미네소타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명문 MIT를 나와 골드만삭스에서 금융경력을 시작했다.

크레딧스위스(Credit Suisse)로 자리를 옮겨 아시아지역의 외환위기 당시 부실채권 정리 등 김대중 정부를 많이 도와 한국 경제계에도 널리 이름을 알렸다. 한인재정협회(Korea Finance Society · KFA )의 창립이사, 미주한인협의회(Council of Korean Americans·CKA) 이사 등으로 동포 단체와 관계를 갖고 젊은 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멘토링하고 있어 미국내 한인사회에서도 신망이 높다.
특히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 NFL의 버팔로 빌즈가 지난해 처음으로 구성한 구단주그룹의 유한 파트너(limited partners) 10명 중 1명으로 소액지분을 갖고 있다. 버팔로 빌즈는 여자프로테니스 세계 3위인 한국계 제시카 페굴라의 부친이 구단주다. 마이크 주는 미국펜싱협회 이사로도 활동하는 등 스포츠 애호가여서 이번 '박찬호 펀드' 참여가 자연스럽다.
한국에서는 생소하겠지만 어센드파트너스는 의료보험과 다수의 개인의료클리닉을 그룹으로 묶어 운영하는 시스템을 사업화한 의료그룹이다. 50억달러(한하 약 6조8천억원) 가까운 자산으로 미국 각 지역의 의료관련 기업을 인수합병하며 규모를 키우는 가운데 최근 2~3년 새 로스앤젤레스의 양대 의사그룹인 서울메디칼과 한미메디칼을 잇따라 사들여 한인사회를 놀라게 했다.
황인선 씨는 한인 2세인 리처드 박과 어센드파트너스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박찬호는 같은 또래인 황 씨와 막역한 친구사이로 어센드파트너스에 투자하기도 했다. '박찬호 펀드'에 참여한 투자자가 이들 외에도 몇명 더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무엇보다 7000만 달러라는 적지않은 규모를 조성하는 데 신망 있는 인사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에서 박찬호의 폭넓은 인맥과 그가 쌓아온 신뢰도가 상당함을 알 수 있다.
투자 대상인 애슬레틱스는 알려져 있다시피 56년간 연고지로 삼았던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인근 오클랜드를 떠나 2028시즌부터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로 옮긴다. 올시즌부터 2027시즌까지 3년 동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트리플A 마이너리그팀이 사용하던 새크라멘토의 야구장을 임시 홈으로 쓴다.
팀 이름에서 연고지 이름도 떼어냈다. 라스베가스의 카지노 리조트 호텔들이 모여 있는 중심지 초입에 신축하는 애슬레틱스의 새 홈구장은 지난 6월 23일 기공식을 갖고 2028년 1월 완공 예정으로 삽질을 막 시작했다. 이 신축구장의 건축비가 17억 8000만 달러(한화 약 2조4400억원)에 달한다.
애슬레틱스 존 피셔 구단주가 사재 11억 달러를 투입하고, 네바다주와 라스베가스 시정부가 공적자금 3억 8000만 달러를 지원하며 US뱅크와 골드만삭스가 3억 달러를 대출해주기로 해 예산은 맞춰놓았다. 다만 공적 자금 3억 8000만 달러는 애슬레틱스 구단이 1억달러를 출연할 때까지 동결되는 조건이다.
애슬레틱스 구단에서 4000만 달러를 마련했지만 나머지는 지분판매 방식으로 투자 받기로 했다. 박찬호의 투자그룹이 조성한 7000만 달러가 여기에 투자되는 펀드다. 박찬호펀드의 투자자들은 애슬레틱스의 지분 2~4% 가량 확보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전문매체 CNBC에 따르면 애슬레틱스는 MLB구단 가치랭킹에서 30개 구단 가운데 18위인 20억 달러로 평가되고 있다. 애슬레틱스는 올시즌만해도 선수단 전체 연봉총액이 다저스의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 1명의 평균연봉 7천만달러를 살짝 웃도는 7300만 달러일 정도로 재정이 허약하다.
1901년 창단돼 필라델피아, 캔자스시티를 거쳐 1968년부터 2024년까지 오클랜드를 본거지로 터잡고 월드시리즈에서 1972~74년 3년 연속 우승하는 등 통산 9회나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한 명문구단이지만 1990년대 이후로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UC버클리대학 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연고도시의 열악한 환경으로 낡은 홈구장을 고치거나 새로 지을 시정부의 재정지원은 기대할 수도 없고 홈 평균 관중 1만 2000명대의 수준으로 구단 자체 수익성도 개선될 여지가 없는 형편에 몰렸다.
지난 2021년 미국 최고의 인기스포츠리그 NFL의 명문팀 레이더스가 오클랜드를 떠나 라스베이거스로 옮겨가자 애슬레틱스도 프랜차이즈 이전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애슬레틱스의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은 1989년이다. 불세출의 톱타자로 꼽히는 리키 핸더슨과 무적의 마무리투수 데니스 에커슬리, 팔뚝치기 세리머니로 '배쉬 형제'라 불린 마크 맥과이어, 호세 칸세코 등이 명장 토니 라루사 감독의 지휘 아래 막강한 전력을 과시할 때였다.
그로부터 35년 동안 가난하고 비루한 시즌으로 점철된 애슬레틱스로서는 생존을 위해 본거지 이동을 결단한 것이다. 박찬호가 하필 그런 구단에 투자할까 싶기도 하지만 '라스베이거스 애슬레틱스'라면 가능성 측면에서 훌륭한 선택이다. 더 추락할 곳 없는 밑바닥에서 올라갈 일만 남았으니 말이다.
각종 회의·전시산업과 쇼비즈니스, 카지노,관광 등을 주력으로 해온 라스베이거스는 지난 2017년 프로아이스하키리그 NHL의 확장계획에 따라 골든나이츠를 창단하면서 처음으로 미국 4대 프로스포츠의 프랜차이즈 도시가 됐다. 2018년에는 여자프로농구 WNBA의 에이시스, 2021년에는 NFL 레이더스를 차례로 유치하면서 메이저 스포츠 연고지로 거듭 나고 있다.
2023년에는 에이시스와 골든나이츠가 동시에 우승트로피를 가져오는 등 성과도 빠르게 나타났다. 두말할 나위 없이 투자는 수익이 최우선적인 미덕이다. 하지만 스포츠팀에 대한 투자는 수익성보다 이른바 오너십 프라이드(Ownership Pride)라는 명예가 더 우선적인 가치가 된다.
미국 프로농구 NBA의 전설적인 스타 매직 존슨이 LA다저스에 5000만 달러를 투자하고 오너십 지분 2.3%를 가진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어깨를 으쓱거릴 만한 '명예가치' 때문이다. LA시민들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나 시장보다 다저스 구단의 주주인 존슨과 또다른 소액주주인 테니스의 전설 빌리 진 킹을 한결 더 추앙한다.
박찬호의 마지막 꿈은 그의 생애를 빛나게 한 메이저리그에서 구단주로 우뚝 서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서울 강남에 수백억짜리 빌딩이 있고 평생 주어지는 선수연금과 각종 활동에 따른 보상수입이 만만찮은 그가 돈을 벌기 위해 메이저리그에 투자하겠는가.
BTS의 슈가도, 삼천리그룹 회장도 메이저리그라는 가치에 투자한 것이다. 메이저리그 구단주 중 한명으로서 박찬호가 일으킬 파급효과는 'K'로 대표되는 한류 스펙트럼의 무한확장이다. 상상만해도 벅차오르지 않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