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에 일방적으로 밀렸던 일본은 1990년 베이징 대회 유도 8체급 가운데 5개의 금메달을 챙겼으나 60kg급 결승에서 한국의 김종만이 경기 종료 10초를 남기고 주심의 석연찮은 지도 판정을 받은 데 힘입어 우승하는 등 심판 판정의 덕도 적지 않게 봤다. 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대회 금메달리스트인 황재길(95kg이상급)은 유도 종목에서 유일한 금메달을 북한에 안겼다. <16편에서 계속>
한국은 이 대회에서도 기초 종목인 육상경기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김봉유가 남자 800m에서 1분49초48로 류태경을 0.52초 차로 제치고 1위로 골인해 트랙과 필드에서 유일한 금메달을 획득했다. 남자 마라톤에서는 2년 전인 1988년 서울 올림픽 성화 점화자인 김원탁이 2시간12분56초로 일본의 시미즈 사토루(2시간14분46초)와 북한의 최철호(2시간18분18초)를 따돌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중국이 43개 세부 종목 가운데 29개의 금메달을 휩쓸었다. 일본 7개와 카타르 3개, 한국 2개 등 나머지 나라들이 획득한 금메달(14개)의 두 배가 넘었다.
자국에서 열린 첫 번째 대규모 국제종합경기대회인 이 대회에서 중국은 중국 전국체육대회를 치르는 듯한 분위기를 이어 갔다. 대회 기간 내내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가 올라갔고 글쓴이는 중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을 저절로 외울 정도로 들어야 했다.
수영에서 지상준은 배영 남자 200m에서 2분03초59로 터치패드를 찍어 일본의 소라오카 교타(2분03초88)와 이토이 하지메(2분04초03)를 제치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수영에서 나온 단 하나의 금메달이었지만 1982년 뉴델리 대회 이후 이어져 온 금메달 행진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값진 메달이었다. 수영은 이 대회 이후 1994년 히로시마 대회에서 2개, 1998년 방콕 대회에서 1개, 2002년 부산 대회에서 1개 등으로 아슬아슬하게 금메달 행진을 이어 간다.
역도는 서울 대회(2개)보다 많은 5개의 금메달로 한국 선수단의 메달 전략에 큰 도움이 됐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들어 올리게 되는 전병관은 56kg급에서 합계 285kg(인상 127.5kg 용상 157.5kg)으로 중국의 류슈빈을 2.5kg 차로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대회 2년 뒤 다시 만난 두 선수는 이번에는 전병관이 287.5kg, 류슈빈이 277.5kg을 기록하면서 승패가 갈렸다. 류슈빈으로서는 같은 시대에 전병관이라는 빼어난 선수를 만난 게 불운이었다.
사격에서는 중국의 초강세(41개 세부 종목 가운데 27개 금메달)에 밀려 애초 목표(10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서울 대회(7개)에 버금가는 5개의 금메달을 차지하며 나름대로 선전했다. 소구경소총3자세의 이은철은 2년 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금 과녁을 명중한다. 세계 최강 한국 양궁에 아시아 무대는 여전히 좁았다. 남녀 개인전과 남녀 단체전 등 4개 세부 종목의 금메달을 휩쓸었다. 남자 개인전에서는 양창훈이, 여자 개인전에서는 이장미가 각각 금메달을 쐈다. 여자 개인전에서는 한국 선수들이 1위부터 4위까지 휩쓸었다. 개인전 출전 선수가 3명으로 제한되는 올림픽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서 김영호(플러레)가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메달(금)을 딴 뒤 한국의 새로운 효자 종목이 된 펜싱은 1970년대 이후 아시아 무대이긴 했지만 중국과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경기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즈음 열린 이 대회에서 한국은 중국과 역시 양강 대결을 펼쳤고 플러레 여자 개인전에서 탁정임, 에페 남자 개인전에서 양달식이 각각 금메달을 찔렀다. 에페 남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추가했다. 에페 남자 개인전에서는 한국 선수들이 1위~3위를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는 구기 종목도 선전했다.
남자는 3위에 그쳤지만 여자 농구는 결승에서 중국에 77-70으로 역전승해 1978년 방콕 대회 이후 12년 만에 정상을 되찾았다. 한국은 6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열린 예선 리그에서는 중국에 60-75로 졌지만 예선 리그 1, 2위 팀이 결승을 치르는 대회 방식에 따라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예선 리그 2차전에서 2m대의 장신 센터 이경숙이 버티고 있는 북한을 70-67로 꺾으며 금메달로 가는 관문을 통과했다. 나머지 예선 리그 경기에서는 태국을 126-47, 일본을 97-72, 대만을 78-56으로 각각 물리쳤다.
핸드볼은 남녀 모두 5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남자는 첫 경기에서 일본을 26-25로 꺾어 첫 고비를 넘긴 데 이어 북한을 38-27로 물리쳤다. 핸드볼은 이 대회에서 남녀 모두 북한과 1945년 분단 이후 처음으로 경기를 가졌다. 이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을 각각 34-25, 32-21로 물리쳤고 최종전에서 중국을 31-26으로 꺾었다.
여자는 서울 올림픽이 끝난 뒤 대표 선수 가운데 80% 정도가 은퇴했으나 경기력은 여전했다. 첫 경기에서 일본을 32-23으로 누른 뒤 홍콩을 40-22, 북한을 40-29, 대만을 31-18로 가볍게 제치고 마지막 경기에서 중국마저 36-19로 크게 이겼다. 여자부는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정식 세부 종목으로 채택됐다. 핸드볼은 이후 1994년 히로시마 대회, 1998년 방콕 대회, 2002년 부산 대회까지 4회 연속 남녀 동반 우승의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대회에서 벌어진 남북 경기 가운데 가장 극적인 승부가 탁구 남자 단체전에서 펼쳐졌다. 한국은 예선 리그 A조에서 네팔과 마카오, 쿠웨이트를 각각 5-0으로 가볍게 따돌리고 8강에 올랐다. 이어 준준결승에서 홍콩을 5-1, 준결승에서 일본을 5-0으로 잡고 결승에 올랐다. 또 다른 준결승에서 북한은 마원거, 천룽찬 등 세계적인 강호가 버티고 있는 홈테이블의 중국을 5-1로 물리치는 파란을 일으켰다.
각각 3명의 선수가 나서 돌려 붙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단체전에서 한국과 북한은 게임 스코어 4-4로 팽팽히 맞섰다. 마지막 9번 단식에 나선 김택수는 북한의 신예 최경섭을 맞아 첫 세트를 21-13으로 따 쉽게 승리하는 듯했다. 그러나 2세트에서는 거꾸로 일방적으로 몰리며 15-21로 세트를 내줬다. 김택수는 마지막 세트에서 1-8, 3-9로 계속 밀리며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이때 승리를 자신한 최경섭의 무리한 공격이 실수로 이어지면서 김택수의 반격이 시작됐고 내리 7점을 뽑아 10-9로 역전했다. 그리고 최종 스코어는 21-19. 한국은 5시간에 걸친 대접전 끝에 대회 2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여자 복식 결승에서는 새로운 국가 대표 짝꿍이 된 현정화-홍차옥 조가 중국의 차오훙-덩야핑 조를 2-0으로 물리치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때 17살의 유망주였던 덩야핑은 이후 1991년 지바(일본), 1995년 톈진(중국), 1997년 맨체스터(영국) 세계선수권대회 단식에서 우승하는 등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한다.
더팩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