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김태연 기자] #1. 제21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가 진행된 지난해 5월 발달장애인 박연지 씨는 투표소에서 눈물을 흘렸다. 손떨림이 있어 투표 보조를 요청하자, 투표사무원은 A4 용지를 내밀며 "여기에 도장을 찍어보라"고 요구했다. 박 씨는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데 어린 아이 시험하듯 '깍두기 공책' 같은 칸에 도장을 찍으라고 해 모욕감을 느꼈다"고 전했다. 박 씨는 결국 '손떨림이 덜하다'는 이유로 투표 보조를 받지 못 했다.
#2. 발달장애인 박경인 씨는 투표소에 가기 전 지지 후보의 이름과 기호를 반복해서 외웠다. 하지만 막상 기표소 안에서 마주한 투표 용지에는 사진도, 색상도 없이 검은색 글자와 숫자만 빼곡했다. 박 씨는 "내가 뽑으려던 사람의 이름과 투표용지 속 이름이 일치되지 않아 한참을 들여다봤다"며 "분명 뽑으려고 정해둔 사람이 있었는데, 막상 흑백 글자들이 나열된 종이를 보니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약 21만명에 달하는 발달장애인 유권자들은 여전히 투표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그림 투표 용지 도입 및 투표 보조 확대 허용 등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24일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발달장애인은 지적 능력 발달이 불충분하거나 자폐증 등으로 사회적 맥락 이해에 어려움을 겪거나 일상생활에 제약을 받는 지적장애인과 자폐성장애인 등을 말한다. 발달장애인 유권자는 투표소 내에서 기표 용지를 읽고 투표하는 과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직관적으로 알기 쉬운 정보와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 소형민 씨는 "투표할 때 수많은 후보자 이름 전체를 기억하기 어렵다"며 "글을 읽기 어려워하거나 낯선 투표소 분위기에 긴장돼 막상 투표소에 들어가면 뽑으려던 후보자가 누군지 헷갈려 하는 사람도 많다"고 전했다.
발달장애인들은 그림 투표 용지나 투표 보조 용구 국내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대만, 영국, 터키, 이집트 등 일부 해외 국가들은 발달장애인의 후보자 식별을 돕기 위해 후보자 사진이나 정당 로고, 고유 심볼을 투표 용지에 삽입하고 있다. 문자를 이해하기 어려운 발달장애인도 후보자의 기호와 이름 등을 비교적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다.

투표 보조 용구는 기표란에 구멍이 뚫려 있어 기존 투표 용지에 덧씌워 사용할 수 있는 별도의 도구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는 현재 시각장애인의 경우에만 기존 투표 용지에 덧씌워 사용할 수 있는 점자 보조 용구를 제작해 각 선거구에 지급하고 있다.
발달장애인들은 투표 보조 확대 허용도 요구한다. 공직선거법 제157조 제6항은 시각장애나 신체장애가 있는 경우 가족 또는 본인 지정 2인의 투표 보조를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발달장애'는 명시돼 있지 않아 현장 투표사무원 재량에 따라 보조 여부가 결정되는 '복불복' 상황이 벌어진다.
이승헌 장애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은 "발달장애인이 투표 보조를 거부당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며 "법안에 발달장애가 투표 보조 가능 사유로 명시돼 있지 않아 어떤 투표사무원을 만나느냐에 따라 투표 보조가 허용될 수도, 허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발달장애인 박모 씨는 투표소에서 본인의 주민등록번호를 정확히 말했다는 이유로 투표 보조를 거부당한 적 있다고 전했다. 박 씨는 "투표사무원이 '주민번호도 외우는데 왜 보조가 필요하냐'는 식으로 반응했다"며 "낯선 환경과 복잡한 절차 때문에 심리적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단순히 주민번호를 외운다는 이유로 부정당했다"고 토로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와 피플퍼스트는 지난 2022년 선관위를 상대로 발달장애인 투표 보조 제공과 그림 투표 용지 제작을 요구하는 차별구제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2024년 12월 "2026년 지방선거부터 그림 투표 보조 용구를 도입하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선관위는 촉박한 준비 기간과 부족한 예산 등을 근거로 대법원에 상고했다.
선관위 관계자는 "지방선거의 경우 선거구가 2300개 이상, 후보자는 9000명이 넘는다"며 "후보자 등록이 끝난 뒤 투표까지 2주라는 시간밖에 없는데, 그 안에 그림 투표 용지나 투표 보조 용구를 제작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투표 보조 확대는 대리 투표 등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어 신중히 접근해야 할 사안"이라며 "심한 손떨림 등 유권자가 '혼자서 기표하기 어려운 신체적 상태'를 갖고 있음이 확인되면 가족이나 사무원의 도움을 받아 투표할 수 있도록 운영 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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