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은 상흔…'2024년 11월'에 멈춘 동덕여대 캠퍼스
  • 이다빈 기자
  • 입력: 2025.11.15 00:00 / 수정: 2025.11.15 00:00
동덕여대 사태 1년, 래커칠은 그대로
구성원 머리 맞댔지만…비용 부담 입장차
"정상화 최우선"…학생들 한목소리
동덕여대에서 남녀공학 전환 추진을 두고 학내 갈등이 불거진 지 1년이 지났다. 지난해 11월 교내 곳곳을 멍들게 한 래커칠은 상흔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다. /이다빈 기자
동덕여대에서 '남녀공학 전환' 추진을 두고 학내 갈등이 불거진 지 1년이 지났다. 지난해 11월 교내 곳곳을 멍들게 한 래커칠은 상흔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다. /이다빈 기자

[더팩트ㅣ이다빈 기자] '남녀공학 반대. 여자대학 지켜내자.'

지난 13일 오후 서울 성북구 동덕여자대학교 정문에 들어서자 빨간색 래커로 건물 외벽에 큼지막하게 적힌 문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스팔트 도로 위로는 '소멸할지언정 개방하지 않는다', '여자대학 지켜내자', '민주동덕은 죽었다' 등 문구가 발에 밟혔다.

길을 따라 우측으로 약 160m를 걸어가자 나타난 동덕르네상스홀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5층짜리 건물 외벽과 유리 출입문에는 '민주동덕. 남녀공학 반대', '여대 존속' 등 검은색, 붉은색, 파란색 등 각양각색의 래커칠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총장 나가', '친일파 숙청' 등 김명애 총장과 학교 설립자를 향한 문구도 눈에 띄었다.

학생관 출입구 앞 바닥에는 지우다가 번진 듯한 노란색과 붉은색 래커칠의 흔적이 보였다. 백주년기념관 앞 학교 로고가 박힌 표지판에는 '공학 반대'라고 적힌 빨간색 래커칠이 흘러내린 모습이었다. 음악대학 수업이 이뤄지는 율동기념음악관 창문에 적힌 '공학전환 완전 철회'라는 문구는 건물 안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 소리와 대조를 이뤘다.

이날 동덕여대 캠퍼스 곳곳에는 래커칠 시위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1년이 흘렀지만 동덕여대 캠퍼스의 시간은 지난해 11월에서 멈춘 듯했다.

동덕여대 학생들은 지난해 11월11일부터 남녀공학 전환 추진에 반대하며 본관을 점거하고 래커칠 시위를 벌였다. 당초 학교는 전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학생 21명을 공동재물손괴와 공동건조물침입, 업무방해 등 혐의로 고소했다. 학교는 이후 지난 5월 '상생협력서'를 체결, 고소를 취하하고 처벌불원서를 제출했다. 다만 친고죄나 반의사불벌죄에 해당하지 않아 학생 38명이 입건됐고 이 중 22명이 불구속 송치됐다.

동덕여대에서 남녀공학 전환 추진을 두고 학내 갈등이 불거진 지 1년이 지났다. 지난해 11월 교내 곳곳을 멍들게 한 래커칠은 상흔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다. /이다빈 기자
동덕여대에서 '남녀공학 전환' 추진을 두고 학내 갈등이 불거진 지 1년이 지났다. 지난해 11월 교내 곳곳을 멍들게 한 래커칠은 상흔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다. /이다빈 기자

첨예하게 대립하던 양측은 지난 7월부터 머리를 맞대고 합의점을 찾기 시작했다. 남녀공학 전환 논의를 위해 학생과 교직원, 교수, 동문 등을 포함한 '공학전환공론화위원회'(공론위)도 출범했다. 공론위는 타운홀미팅과 설문조사 등 결과를 바탕으로 이달 내 공학 전환과 학교 발전 방향에 관한 권고문을 학교 측에 제출할 예정이다. 학교는 이를 토대로 최종 판단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시설 복구는 좀처럼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월에서야 학생과 학교 측에서 4명씩, 총 8명으로 시설복구위원회를 구성해 래커칠 처리 방안 논의에 돌입했다. 학교는 래커칠에 따른 피해액을 최대 54억원으로 추산했다. 양측은 래커칠 제거 비용 부담을 두고 여전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

학교 관계자는 "시설복구위원회 논의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학교에 래커칠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학교가 유지해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합의를 통해 시설 복구 비용과 시기를 결정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숙의 과정에서 수차례 토론을 했고 수백명을 대상으로 타운홀미팅, 투표, 설문조사를 거쳤다"며 "구체적인 시일이 정해지진 않았지만 모든 과정의 결과가 권고문에 충분히 포함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학생들은 학교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민주동덕 제58대 중앙운영위원회(중운위)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설 복구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 725명 중 53.1%는 '모금과 교비로 비용을 마련해야 한다'고 답했다. 42.1%는 '학교가 소통하지 않아 발생한 문제로 교비로만 집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학생 A(27) 씨는 "래커칠 시위 방식 자체에 '왜 그렇게까지 했나'라는 의견도 있지만 더 이상 남은 방법이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학교에서 원인 제공을 했으니 시설 복구도 학교가 책임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동덕여대에서 남녀공학 전환 추진을 두고 학내 갈등이 불거진 지 1년이 지났다. 지난해 11월 교내 곳곳을 멍들게 한 래커칠은 상흔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다. /이다빈 기자
동덕여대에서 '남녀공학 전환' 추진을 두고 학내 갈등이 불거진 지 1년이 지났다. 지난해 11월 교내 곳곳을 멍들게 한 래커칠은 상흔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다. /이다빈 기자

해법을 찾지 못하는 사이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 몫으로 돌아갔다. 특히 올해 입학한 신입생들은 지난 1년 어수선한 환경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기대감에 부풀었던 신입생들은 학교의 대처에도 아쉬움을 토로했다.

B(19) 씨는 "학교 상황을 잘 모르는 상태로 열심히 공부해 입학했는데 시설 복구를 왜 아직도 하지 않았는지 아쉬운 마음"이라며 "학교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욕하는 것을 볼 때도 속상하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학교가 안정화할 기회를 놓친 것 같다"며 "학생과 학교가 대립한 현장을 남겨두는 것이 대외적 이미지나 학생 보호 차원에서 의미 있는 행동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C(20) 씨도 "여중, 여고에 로망이 있었고,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동덕여대에 진학했다"며 "처음 입학했을 때부터 래커칠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보기 싫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는데, 내년 신입생들을 위해서라도 래커칠이 지워져야 한다는 것에 대부분 공감한다"고 털어놨다.

학생들은 하루 속히 정상화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중운위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95.2%는 '래커칠 미화작업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유는 △미관상의 이유 △학교 이미지 개선 △26학번 신입생 고려 등이었다. 특히 '11~12월 내 래커칠이 지워지길 희망한다'는 답변이 85.5%를 차지했다.

4학년 재학생 D(24) 씨는 "학교에 남은 래커칠은 단순한 흔적이 아니다. 외부는 물론 내부에서도 불안과 갈등을 지속시키는 선택을 한 것"이라며 "학교가 학생들의 얘기를 열린 마음으로 들어주고 신뢰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answerin@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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