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준비청년은 아동양육시설이나 위탁기관에서 성장하다가 열여덟살이 되면 원하든 원치않든 '자립'해야 하는 이들이다. 서울시에서만 한해 150명가량이 홀로서기에 나선다. 하지만 이들은 세상과 만나자마자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다. 국가의 자립 지원은 시설 출소 후 5년에 그친다. <더팩트>는 자립준비청년들의 힘겨운 현실, 공공·민간의 역할과 개선점을 2회에 걸쳐 보도한다.<편집자주>
[더팩트ㅣ설상미 기자] "중학교 때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는데, 안정된 직장을 가진 선배를 보면서 꿈이 생겼어요."
서울교통공사에 근무 중인 이정민(26·가명) 씨는 중학교 3학년 시절을 인생의 큰 전환점으로 기억한다. 마포구의 한 아동양육시설에서 자라면서, 앞날에 대한 희망을 잃고 때로는 극단적인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공직에 나선 선배의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자신만의 꿈을 품게 됐다. 공기업 취업을 목표로 은평구 내 특성화고에 진학한 정민 씨는 공무원 시험 학원도 병행했다. 2018년 3월, 정민 씨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교통공사에 입사하는 꿈을 이뤘다. 지난해에는 우수한 업무 성과를 인정받아 사장 표창까지 받았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2023년 서울시립대 교통공학과 편입을 성공해 여러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그해 여름,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던 정민 씨는 동료들과의 휴가 중 사고를 당했다. 물놀이 도중 어깨가 탈구되고, 관절을 지탱하던 근육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응급실에서 뼈를 맞췄지만 결국 수술이 불가피했다. 수술비와 재활 치료비를 포함해 총 400만 원가량. 당시 24세였던 그에겐 감당하기 벅찬 금액이었다.
자립준비 기간이 끝나 자립청년이 되었다고 해도, 대부분 20대 초중반 청년이기 때문에 '홀로서기'를 위한 충분한 준비가 돼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보호종료 5년 이후에는 모든 지원이 일괄 중단되기 때문에 별다른 도움을 받기 어렵다. 이에 서울시는 민간 후원금을 활용해 'SOS자금'을 신설하고, 긴급 위기 상황에 처했거나 도움이 필요한 자립청년에게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정민 씨는 시 자립지원전담기관을 통해 이를 신청했고, 의료비 약 200만 원을 지원받았다. 나머지 금액은 실비보험으로 충당했다. 정민 씨는 "자립지원 전담 요원의 수가 부족하다"며 "전담 요원과 잘 소통하거나, 네트워크가 잘 구축돼 있었다면 저 같은 상황에 있는 자립청년들도 훨씬 수월하게 제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인력 부족이 여전히 걸림돌이다. 자립지원 전담인력은 아동양육시설을 퇴소한 만 18세 청년들이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들은 자립청년의 생활 상황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주거·취업·의료 등 실질적인 지원을 연계한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백종헌 국민의힘 의원실이 보건복지부와 아동권리보장원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전국 자립준비청년은 9970명, 자립지원 전담인력은 217명으로 집계됐다. 전담인력 1명이 평균 46명을 담당하는 셈으로, 개별 청년의 상황에 맞춘 세심한 지원이 사실상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도 자립청년들을 위한 사회적 연결망 구축과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더팩트>와 통화에서 "자립준비청년에게는 가족이나 지인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지속적으로 삶을 점검해 주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체계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조직화된 삶의 경험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처럼 동행자가 있어야 자립의 여정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멘토링·심리상담 등 전문성 바탕 실질적 취업 지원 필요
정민 씨는 시설에 있는 후배 3명도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이 중 2명은 고등학교 2학년 쌍둥이 형제, 나머지 한 명은 초등학교 2학년 아동으로 모두 정민 씨가 생활하던 시설에서 자란 동생들이다. 특히 후원 중인 쌍둥이들은 공무원이 된 정민 씨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 정민 씨는 3개월에 한 번씩 직접 시설을 방문해 후배들을 만나고, 틈틈이 1대1 멘토 활동을 통해 여러 후배들을 이끌어주고 있다.
"제가 시설에 있을 때 영양사 선생님께서 몰래 저를 후원해주셨다는 걸 퇴소 직전에 알게 됐어요. 너무 감사했죠. 물질적으로 되갚는 것보다는, 후배를 도우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어요. 제가 공무원 된 뒤, 같은 길을 따라온 후배들이 지금 4명 정도 돼요. 연결고리가 많이 있으면 어려운 일이 생겨도, 혼자보다는 함께 해결할 수 있어서 자립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거예요."
시는 자립청년 자조모임 지원 등을 통해 심리·정서지지, 사회기여활동 기회를 제공하는 오프라인 모임을 운영하고 있으며, 오는 2028년까지 참여 인원을 580명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아울러 1대1 진로설계 컨설팅, 맞춤형 학습지원 등을 통해 진로 상담도 지원하고 있다. 정순돌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멘토링이나 심리상담 등 전문성을 강화해 실질적인 취업 지원으로 이어져야 한다"며 "국가의 역할뿐 아니라 민간 자원의 협력도 함께 고민해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