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정인지·송호영 기자] 영하 10도의 한파가 몰아친 지난 6일 서울역 지하보도에는 망가진 우산, 종이박스, 쇼핑백 등이 한데 뒤섞여 쌓여있었다. 박스에는 '가져가지 마', '남의 박스 손대지 마. 죽는다' 등 문구가 적혀있었다.
추위를 피해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는 60대 노숙인 이모 씨는 "겨울엔 지하보도에서 자고, 여름엔 광장에 나와서 잔다"며 "4~5월까지는 추우니 지하보도에서 자는데, 한기가 올라오지만 추워도 살기 위해서 누울 자리에 핫팩을 넓게 깔아놓고 자곤 한다"고 전했다.
거리의 노숙인들이 지하보도에서 칼바람을 막아내며 겨울을 나고 있다. 노숙인들은 추위를 견디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며 봄이 오길 기다릴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날 오전 10시 서울역 9번 출구 방향 지하보도에 A 씨가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체감온도 영하 15.6도까지 떨어진 최강 한파에 A 씨는 잡동사니로 요새를 쌓아 한기를 막았다. 이마저도 모자라 패딩과 이불, 모자로 몸을 감싸고 잔뜩 웅크린 채였다. 노출된 신체 부위는 투명한 안경 너머 눈꺼풀 뿐이었다.
그의 손이 닿는 곳에는 이빨 자국이 선명한 떡과 먹다 남은 사과 조각이 무질서하게 놓여있었다. 눈을 감고 있던 A 씨는 지나가던 행인이 "여기 별에 별 거 다 있네. 쇼핑백도 많고. 하나 주워가면 되겠네"라고 하자 눈을 번쩍 떴다가 다시 감았다.
서울역 6~7번 출구 방향 지하보도에도 각종 잡동사니와 비닐 뭉치, 낡은 캐리어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먹다 남은 믹스커피도 종이컵에 담겨 곳곳에 남아있었다. 비둘기 2마리는 이들 사이로 지나다녔다. 지하보도에 자리 잡은 노숙인들은 박스로 벽을 세워 서로의 공간을 분리했다.
벽에 맞닿게 박스를 ㄴ자로 세운 한 노숙인은 세 겹의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었다. 60대 B 씨 또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누울 자리에 박스를 세워두고 잠을 청했다. 박스 안에는 빈 생수병과 페트로 된 소주병이 뒹굴고 있었다. B 씨는 "당신이 내게 점퍼를 줄 거냐, 밥을 살 거냐"며 "한기가 올라와서 죽겠다. 나라고 여기 있고 싶은 줄 아냐"고 토로했다.
60대 곽모 씨는 ㅁ자로 된 박스 벽을 세웠다. 곽 씨는 자신의 종아리 높이까지 오는 박스 안으로 다리를 넣어 1평 남짓 공간에 들어갔다. 곽 씨는 "이게 내 집이고 방이고 세상이다. 내 전부"라고 했다. 그의 세상 안에는 패딩과 담요, 귀마개, 지퍼백에 담긴 초코과자, 컵라면 박스 등이 놓여있었다.
서울역 광장에 나온 노숙인들도 보였다. 이들은 칼바람 앞에 팔짱을 끼고 몸을 웅크렸다. 다리에도 패딩을 묶거나, 이불을 망토처럼 어깨에 두르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90대 C 씨는 광장 중앙 강우규 의사 동상 아래 박스를 놓고 앉았다. 패딩 위에 조끼, 털모자를 착용한 C 씨는 "거리에서 맞은 겨울이 10번이 넘는다. 그냥 견디는 거다. 사는 게 그렇다"며 "밤이 걱정이지. (어디서 잘 지는) 대중없다. 그날그날 알아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방한용품을 도난당했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이도 있었다. 서울역 2번 출구 옆에 놓인 이불더미 위에는 돌로 고정한 불투명 비닐과 막걸리병 등이 놓여있었다. 흰 박스 위에는 '도둑놈들아. 고장 난 여행용 가방과 침낭, 이불, 담요, 내복, 핫팩, 라면 등등 돌려주라. 경찰에 신고 중이다. 잡히면 죽는다'는 내용이 적혔다.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으로 내려가는 6번 출구 앞에도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짧은 머리의 D 씨는 군복 무늬 패딩을 입고 계단에 앉아 막걸리와 파김치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D 씨는 "누구냐. 다가오지 말라"며 지하상가 방향으로 내려갔다.
인근 서울시립 보현희망지원센터에는 노숙인들이 5분에 한 명꼴로 드나들었다. 지원센터는 노숙인 등 취약계층을 위한 한파 응급대피소로 지정된 곳이다. 한파특보 발령 시 24시간 가동되며 서울 전역의 공공시설, 숙박시설 등을 이용하는 형태로 현재 90곳이 운영 중이다.
지원센터 오른쪽 담벼락에는 노숙인 3명이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마시며 추위를 이겨내고 있었다. 안전을 우려한 경찰이 "이곳에서 술을 드시지 말라"며 만류했지만, 이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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