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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터널에서 나와 활짝 웃고 있는 박완규./김중만 사진작가 제공 |
[심재걸 기자] "이제 햇빛이 좋아졌어요."
이 한마디로 모든 게 정리됐다. 어둡고 긴 터널에 숨어있던 대한민국 로커 박완규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 새 음반 활동도 시작했다. 단독 콘서트, 그룹 부활 공연 등을 비롯해 내년 쯤에 발매할 6년 만의 정규 5집 준비도 한창이다.
막바지 여름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완규는 "불과 8개월 전만 하더라도 해뜨면 자고 해지면 일어나고…. 자꾸 어둠만 찾아 다녔는데 이제 태양을 내리 쬐는 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며 검게 그을린 피부를 자랑스러워 했다.
박완규는 1996년부터 그룹 부활의 다섯번째 보컬리스트로 활동하며 '론리 나이트(Lonely Night)' 등의 대표곡을 남겼다. 1999년 솔로 데뷔곡 '천년의 사랑'은 '노래 좀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애창곡에 꼽힐 정도로 가요사에 한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비극은 이 때부터였다.
사람들은 대단한 히트를 기록했다며 부러워했지만 소속사와 갈등으로 수입은 박완규에게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한 달 수입은 100만원 남짓이었고, 일찍한 결혼에 두 아이의 분유값도 겨우 맞춰지는 상황이었다. 나이트클럽, 라이브카페를 전전하며 겨우 생활을 이어갔다.
"점점 무너지고 지쳐갔다. 사람들 조차 만날 수가 없었다. 지갑에는 1만원 혹은 5000원이 전부였다. 계속되는 밑바닥 생활에 자신감은 사라지고 희미해진 불씨 마냥 의욕은 땅에 떨어졌다. 목 관리도 전혀 하지 않았다. '아파도 대강 부르면 되지'라면서 5~6년을 막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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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웠던 지난 6년을 털어 놓은 박완규./김중만 사진작가 제공 |
2010년 12월, 급기야 박완규는 음악을 포기하겠다는 결심까지 이르렀다. 당시 자신의 모습을 두고 "몸은 배만 나와 완전 망가져있고, 피부는 거칠다 못해 회색빛의 푸석한 느낌이었다. 성대는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로 묘사했다.
때를 같이해 첫 사랑이었던 아내와도 이혼을 했다. 문제는 역시 생활고였다. 박완규는 전 아내에게 "미안했다"는 말부터 꺼냈다. "20년 가까이 함께 했지만 번듯한 집도 없었고 그동안 쌓였던 빚만 어마어마 했다. 그러면서 많이 싸웠다. 서로 괴로워하면서 인생을 같이 망가뜨릴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두 아이에겐 죄책감이 더 컸다. "아이들에게 결손 가정을 만들어 준 게 가슴 아프다. 내가 로커든 가수든 이런 걸 떠나서 가장 먼저 해야될 일은 아이들을 잘 키워야한다. 아버지 타이틀에 걸맞게 의무를 다하는 게 지상 과제고 목적인데 지금까지 제대로 한 게 없다."
박완규는 "그래도 아이들은 아빠가 자랑스럽단다. 또 첫째는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잘 될 때까지 잘 참고 동생 잘 챙겨주겠다'고 하더라. 중학생에게 이러한 정서와 말이 가능한가"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래서 이혼이 영원한 남남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박완규는 "그 친구는 평생 책임질 것"이라며 "인생의 절반을 나와 함께 했던 사람이고 아이들의 엄마다. 여자로 따지면 가장 황금기 나로 인해 허비했다. 한번도 제대로 행복하게 해준 적 없는데 나머지 인생이라도 책임지겠다. 살갑게 남편 노릇은 못 하겠지만 경제적으로 힘들게 해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