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김샛별 기자] 배우 염혜란이 연기하는 방법은 단순하면서도 어렵다. 캐릭터의 감정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에 집중한다. 즉 그 캐릭터가 처한 상황, 그 앞에 일어난 이미지 등을 떠올리면서 집중하는 것이 그의 연기 비결이다. 그렇게 탄생한 무수한 캐릭터들은 배우 염혜란의 또 다른 이름이 됐다. 염혜란은 오늘도 또 하나의 새로운 이름을 새기기 위해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염혜란은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더팩트>와 만나 영화 '내 이름은'(감독 정지영) 공개 기념 인터뷰를 진행했다. 극 중 잊어버린 기억을 되찾아 가는 어머니 정순 역을 맡은 그는 작품과 캐릭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지난 15일 개봉한 영화 '내 이름은'은 촌스러운 이름을 지우고 싶은 18세 아들 영옥(신우빈 분)과 1949년 제주의 아픈 기억을 되찾으려는 어머니 정순의 이야기를 담는다.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되며 일찌감치 작품성을 인정받은 이 영화에서 염혜란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정순으로 분해 관객들의 마음을 두드렸다.
염혜란에게 제주도는 낯선 곳이 아니다. 전작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애서도 제주의 풍광을 배경으로 애순(아이유 분)의 억센 어머니 전광례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바 있다. 이에 또 한 번 제주를 찾게 된 그에게 어떤 차이점이 있을지 궁금했다. 염혜란은 "그전에는 개인적으로 힐링의 공간이었다면, 이번에는 역사적인 공간이라 느낌이 전혀 달랐다"고 운을 뗐다.
"곳곳이 아픔이 서린 공간이더라고요. 예전에는 예쁜 사진을 찍기 바빴다면, 이제는 저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를 생각하게 돼요. 아름다우면서도 아픈 풍경으로 다가왔죠."

사실 '내 이름은'은 세상에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정지영 감독이 직접 투자자를 찾아 발로 뛰어야 했을 만큼 영화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염혜란은 "2023년 당시 영화계가 너무 힘들었다. 푸른 보리밭을 담으려면 시기를 놓치면 안 되는데 투자도 늦어지며 결국 1년을 더 기다렸다"고 회상했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작품을 선택하기까지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칫 역사적 메시지가 너무 전면에 드러나거나 선동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본은 생각보다 훨씬 서정적이고 문학적이었다. '이름'이라는 상징으로 풀어가는 서사는 염혜란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기다림 끝에 완성된 영화를 그는 베를린에서 처음 마주했다. 보통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링하기 바쁜 첫 상영이었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 평론가분이 '이 영화의 완성은 엔딩 크레딧'이라고 하셨는데 정말 공감했어요. 수많은 이름이 올라가는데 제가 그분들과 함께 베를린에 와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정순이라는 인물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염혜란은 전형성을 탈피하고자 노력했다. 염혜란은 "희생자나 피해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고통스러운 모습에만 갇히고 싶지 않았다. 정순은 그 이후에도 삶을 영위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아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인물이다. 자식에게 모든 걸 올인하는 엄마가 아니라 '쿨한 어른'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 인물의 다채로운 인생사와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극 중 선보인 한국무용 역시 정순의 정서를 담아내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염혜란은 "느린 가닥에서 오는 한국무용의 아름다움과 한이 작품과 닮아 있었다"며 "정서가 가는 대로 추라는 감독님의 말씀에 몰입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이게 가장 어렵지 않나. 지금 찍으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아쉬움도 남는다"고 미소 지었다.
촬영 현장은 자연과의 사투였다. 노을을 담기 위해 빛의 속도로 움직여야 했고, 바람 때문에 소중한 장면들이 편집되기도 했다.
"보리밭 장면을 찍을 때 정말 많이 울었어요. 단순히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시체를 먹고 자란 보리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피로 얼룩진 곳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가슴이 무너지더라고요. 그 찬란한 4~5월의 풍경이 너무 슬펐습니다."
염혜란은 실존 인물들의 증언집을 보며 캐릭터의 감각을 찾아나갔다. 그는 "순사들의 검은 옷과 모자가 까마귀 같아서 까마귀만 봐도 가슴이 덜컥한다는 증언이 기억난다. 후에는 피해자들이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어떻게 부자가 됐는지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문득 내가 역사를 전형적으로만 보고 있었구나 싶어 반성했다. 피해자의 삶을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풍부한 이야기들이 그 안에 있었다"고 돌이켰다.

영화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중첩된 복잡한 레이어를 다룬다. 정순 역시 피해자이면서도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는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 염혜란은 "감독님이 '과거에 머물러 누군가를 탓하는 건 제주에 또 다른 트라우마를 만드는 일'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참 좋았다"고 전했다.
함께 호흡을 맞춘 신인 신우빈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염혜란은 "우빈이의 해사함과 맑음이 작품을 보는 젊은 세대들의 마음을 열어줄 것이라 믿었다. 정말 친구 같은 모자처럼 보여야 했다. '너도 영옥이고 나도 영옥이면 어떡하냐'는 물음에 '큰 영옥, 작은 영옥 하면 되지'라고 답하는 장면이 우리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보여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최근 연이은 흥행작들로 대중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그지만,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다. 염혜란은 "인지도가 높을 때 작품들이 쏟아져 나와서 몰아서 선택한 것 같지만 사실 다 오래 기다려온 작품들이다. 하나로 규정되는 것보다는 배우로서 만들어내는 온기를 좋아하는 편"이라고 전했다.
끝으로 배우 염혜란의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길 원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현답을 내놓았다.
"누군가는 염혜란, 누군가는 홍자영, 또 누군가는 애순이 엄마라고 부르죠. 그렇게 저의 많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요. 그게 배우로서 가장 행복한 일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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