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박지윤 기자] 그동안 수많은 대표작과 인생 캐릭터를 탄생시켰던 배우 손예진이 오랜만에 스크린에 돌아왔다. 그 사이 아이를 품에 안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 그는 개인의 가치관부터 배우의 시각까지 모든 게 달라진 자신을 담은 '어쩔수가없다'로 두 번째 챕터를 활짝 열었다.
손예진은 지난 24일 스크린에 걸린 영화 '어쩔수가없다'(감독 박찬욱)에서 만수(이병헌 분)의 아내 미리 역을 맡아 7년 만에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개봉 전날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카페에서 <더팩트>와 인터뷰를 한 그는 "배우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곳곳에 잘 포진돼 있다. 네 번을 봤는데 볼 때마다 웃기다. 이를 찾아가는 재미도 있다"고 높은 만족감을 표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꺼냈다.
소설 'THE AX(액스)'를 원작으로 하는 '어쩔수가없다'는 '다 이루었다'고 느낄 만큼 삶이 만족스러웠던 회사원 만수(이병헌 분)가 덜컥 해고된 후 아내 미리(손예진 분)와 두 자식을 지키고 어렵게 장만한 집을 지켜내기 위해 재취업을 향한 자신만의 전쟁을 준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어쩔수가없다'는 손예진이 '협상'(2018) 이후 7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작품이자 박찬욱 감독과 처음 작업한 결과물로 많은 기대를 모았다. 이에 그는 "캐릭터의 분량을 떠나서 임팩트나 갖고 있는 게 모호했다. 내가 꼭 해야될까? 잘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박찬욱 감독님과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하며 출연을 결심한 이유를 밝혔다.
"제 복귀작이고 박 감독님과 하고 싶어서 명분을 만들어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제가 꼭 해야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죠. 감독님은 입바른 소리를 못 하세요. 처음부터 미리는 조연이고 만수가 이야기를 다 끌고 가지만 미리가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나중에 주변 사람들에게 '이거 왜 했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미리의 과거가 만들어졌고 조금 더 이야기의 흐름 속에 흘러가는 인물이 됐죠."
배우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작업해 보고 싶은 박찬욱 감독과 '어쩔수가없다'로 처음 만난 손예진이다. 그가 현장에서 본 박 감독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첫 촬영부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장어를 읊어야 했던 에피소드를 떠올린 손예진은 "집요하시고 하나도 허투루 넘어가는 게 없고 생각지도 못한 디렉팅을 주셔서 멘붕이었다"면서도 "그렇지만 이를 겪어보니까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 마치 숙제를 검사받는 학생처럼 제가 준비해 온 것을 받아들여 주셨을 때 행복하더라. 점점 익숙해지면서 클리어했을 때의 행복감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2022년 현빈과 결혼한 손예진은 그해 11월 아들을 품에 안고 육아에만 집중했다. 배우이기 전에 엄마의 삶에 몰두했던 그는 '어쩔수가없다'를 만나 2022년 종영한 '서른, 아홉' 이후 약 2년 반 만에 배우로서 대중 앞에 섰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하고 공백기를 보내다가 다시 현장에 돌아온 만큼, 그동안 미처 몰랐던 즐거움과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2년 동안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를 만나 제 에너지를 200% 쏟았는데 육아가 마냥 행복한 건 아니잖아요. 제 신경이 계속 아이에게 쏠리다 보니까 스위치가 꺼지지 못한다는 걸 처음 느꼈어요. 그동안 고통스러웠던 일이 쉽게 느껴질 정도로 육아가 진짜 힘들었죠. 그러다가 복귀하니까 차만 타도 행복하더라고요. 연기할 때의 긴장감과 몰입할 때의 희열들이 너무 좋았어요. 대단한 선배님들이 포진돼 있었기에 근사한 작품이 나올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더 행복했죠."
극 중 미리는 남편 만수의 갑작스러운 실직으로 기세가 기우는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대처하는 아내로, 가족의 중심을 지키는 밝고 강인한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테니스와 댄스라는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할 말은 하는 그는 남편이 저지른 일을 적당한 수준에서 봉합하면서 스스로의 미래를 준비한다.
"제가 미리를 연기했으니까 미리의 입장에서 만수를 보면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만수가 저지른 일은 당연히 공감받고 이해받을 수 없지만 저는 만수가 소름 끼치게 무섭다기보다는 안타까웠어요. 결말을 보고 '그럼에도 이들이 잘 살았을까?'에 의견이 분분했는데 저는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미리는 되게 긍정적인데 사실 이게 쉽지가 안잖아요. 쿨하고 유연한 미리가 부러우면서도 연기하면서 대리만족도 됐어요."

이를 연기한 손예진은 박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은 여성 캐릭터이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지금껏 본 적 없는 새로운 얼굴을 꺼내며 신선함을 더한다. 이는 당연히 캐릭터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남다른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결혼과 출산을 한 후 자연스럽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연기할 때 여유가 생긴 덕분이기도 했다.
"엄마가 됐기에 표현이 달라졌다는 건 잘 모르겠어요. 다만 예전에는 일을 하면 무조건 잘해야 됐어요. 그게 저를 갉아먹는 일이라도 모두 던져서 해야된다는, 배우로서 책임감을 느껴서 힘들었었거든요. 사실 제가 힘들게 살아야 편한 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하루를 열심히 살려고 해요. 아이에게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가면 그것만으로 감사하거든요. 그러면서 일의 소중함을 느꼈고 이게 연기적으로도 묻어나온 것 같아요."
그런가 하면 이날 '어쩔수가없다'를 본 현빈의 반응과 관련된 질문에는 "저희는 칭찬은 없다. '수고했다' 정도다. 굉장히 쿨한 부부"라면서도 "아직 깊이 얘기하지 못했다. 어제 시사회 끝나고 손님들을 맞이했으니까 오늘 집에 가서 얘기해봐야한다"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동안 엄마의 삶에 집중했던 손예진은 '어쩔수가없다'에 이어 넷플릭스 '스캔들'과 '버라이어티'로 전 세계 시청자들과 만날 예정이다. 그는 각각 뛰어난 재능과 매력을 갖췄지만 여자로 태어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적 현실에 맞서 사랑 내기를 펼치는 조씨 부인 역과 대한민국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대표 세은 역을 맡아 또 한 번 색다른 얼굴을 꺼낼 준비를 마쳤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차기작을 언급하며 새로운 시도를 귀띔한 손예진은 "'스캔들'은 언제 또 그런 캐릭터를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층적인 인물이라서 연기하기 어려웠지만 재밌었다. '버라이어티'는 외모부터 파격 변신이 될 것 같다"고 앞으로의 행보를 더욱 기대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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