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강일홍 기자]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16년 8월 '사드 보복, 한류스타 중국 내 행사 전면 봉쇄'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기사는 '중국의 반대에도 한반도에 사드를 배치하기로 한 결정 때문에 한국의 주요 수출품인 한류가 중국 당국의 보복 타깃이 되고, 한류스타가 참가할 예정인 행사에 대해 취소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고 전했는데요. 실제로 김우빈 배수지의 팬미팅이 갑자기 연기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행사 주체였던 유쿠 측은 "우리도 통제할 수 없는 힘 때문에 무기한 연기됐다"고 밝혔고, 당국으로부터 어떤 제스처가 있었음을 암시했습니다. 물론 그때만 해도 다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정치 외교적 이해관계에 의한 일시적 조치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죠. 한류 콘텐츠의 막강 파워를 자랑하던 중국에서의 한류 흐름은 이후 동맥경화처럼 막혔습니다. 무려 9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한령(限韩令)' 또는 '금한령(禁韓令)' 한류 압박 조치, 9년간 '봉쇄'
대중문화 콘텐츠는 수요공급 원칙이 더 민감하고 철저합니다. 중국 내 수요가 폭발하면서 초대형 콘텐츠 제작에 활력을 얻었고, 직전까지만 해도 중국 내 투자는 봇물을 이뤘습니다. 그런 만큼 장기간에 걸친 '한류 콘텐츠 봉쇄'는 국내 엔터산업계에 더큰 치명타를 안겼습니다. 공급 무대가 인위적으로 사라지고, 기간 또한 10년 가까이 길어지면서 이미 완성된 세계적 한류 위상마저 위축되는 악순환이 반복됐습니다.
한가지 특기할만 것은 이른바 한한령(限韩令) 또는 금한령(禁韓令)으로 불린 이 압박 조치는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는 한번도 이를 인정한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명문화된 법령이나 규정없이 주로 콘텐츠 심의를 지연하거나 중단하는 방식 또는 한국 연예인에 대한 비자 발급 제한 등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제재를 해왔기 때문인데요.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언제든 강도를 조절하고 완화할 수 있는 중국식 컨트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정부, "제한 조치 시행한 적 없으니 해제할 것도 없다" 선언
그 답답함이 마침내 풀리는 분위기입니다. 훈풍은 연초부터 불기 시작했고, 현장에서 빠르게 체감하는 업계에서는 사실상 문호가 개방됐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가시적 해제 분위기를 탄 뒤 중국 정부는 "제한 조치를 시행한 적이 없으니 해제할 것도 없다"고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질적 개방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중국식 대외 방침은 한동안 족쇄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긍정신호로 비치기도 합니다.
인적 및 콘텐츠 교류를 위한 양국 간 관계자들의 협력방안은 점차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지난 23일 서울 앰배서더 풀만호텔에서 중국 제20차 중앙위원, 중국전국귀국화교연합회 당서기 겸 주석 만리쥔의 방한 행사가 중국재한교민협회 주최로 열렸습니다. 이날 특별히 눈길을 끌었던 순서는 한한령 해제를 위한 K-POP 한중평화협회 출범식이었는데요. 주한 중국대사 다이 빙의 축사도 무게감을 더했습니다.
가시적인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트로트 가수 윤수현은 최근 중국 하이난성의 하이코(海口)시에서 열린 한중 교류 기념 행사 무대에 섰습니다. 한국어 노래 '천태만상' 뿐만 아니라 중국 노래 '첨밀밀(甜蜜蜜)'을 중국어로 열창했는데요. 윤수현은 "무대가 끝난뒤 엄청난 박수세례에 전율을 느꼈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한한령 이후 한국 대중가수가 중국 영토에서 공식 행사 무대에 선 게 처음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큽니다.
국내 주요 음악시상식도 올해부터 일본 등 동남아 대신 본토 공략
가요단체 연예제작자협회가 주관하는 '드림콘서트'는 오는 9월 중국 하이난성에서 처음 펼쳐집니다. 국내 빅4 기획사 소속 특급 아이돌 그룹 가수들이 대거 출연을 약속한 초대형 무대인데요. 날짜와 장소 시간 등 현재 중국 측 파트너와 세부안을 마련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무슨 일이든 교류가 본격화하려면 첫 물꼬가 중요합니다. 연제협 관계자는 "올 행사를 계기로 2027년까지 매년 중국 콘서트를 약속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올해 하반기부터는 국내 주요 음악시상식들이 중화권으로 벌써 눈길을 돌리는 분위기입니다. 이는 예년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중국쪽에서 먼저 제안하고 손짓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데요. 지난해까지만해도 일본이나 베트남 태국 필리핀 등 변방이 주 무대였다면 앞으로 중국 본토를 겨냥한 한류 음악시상식 러시가 가능해진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해빙 무드에 가장 반색하는 곳은 역시 K-POP과 K-드라마, K-무비입니다.
대중문화 콘텐츠 시장에서도 파급효과가 막대하기 때문인데요. 영화나 드라마 등 한때 자금이 넘쳐났던 대중문화 콘텐츠 시장은 극심한 제작비 부족에 신음하다 넷플릭스나 디즈니 플러스 등 글로벌 OTT시장에 IP를 내주는 불리한 상황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중국과의 교류가 한한령 이전처럼 활성화된다면 국내 엔터산업은 새로운 차원의 르네상스를 다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중국 본토 한류개방이 반가울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