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박지윤 기자] 주연 배우의 마약 투약 혐의가 불거지면서 공개가 불투명해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관객들에게 닿은 작품이 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를 묵직하게 그려내며 감동을, 바둑의 매력으로 재미를 잡으면서 '유아인 리스크'를 품고 배우들의 열연과 작품성으로 정면 '승부'에 나섰다.
26일 스크린에 걸린 영화 '승부'(감독 김형주)는 대한민국 최고의 바둑 레전드 조훈현(이병헌 분)이 제자와의 대결에서 패한 후 타고난 승부사 기질로 다시 한번 정상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 '보안관'(2017)의 김형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대한민국 바둑 기사 최초로 전 세계 바둑대회에서 일본과 중국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전관왕을 차지한 조훈현은 전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던 때 바둑 신동이라 불리는 이창호(유아인·김강훈 분)를 만난다.
이창호의 실력을 알아본 조훈현은 그를 수제자로 받아들여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본격적으로 바둑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타고난 천재성을 믿는 게 아닌, 기본기와 겸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수년이 흐른 후, 공격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는 스승과 달리 제자는 돌 하나를 매우 신중하게 놓는 바둑 기사로 성장했다. 이후 성사된 스승과 제자의 첫 맞대결에서 스승이 승리할 거라고 예상하는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훈현은 기세를 탄 이창호에게 패하고 만다.
오랜만에 패배를 맛본 조훈현과 승부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된 이창호다. 제자에게 패배의 쓴맛을 제대로 맛본 스승은 이로 인해 좌절하고 바둑을 내려놨다가 타고난 승부사적 기질을 되살리고 초석부터 새롭게 다지면서 다시 한번 정상에 도전할 결심을 한다.
'승부'는 바둑이 월드컵보다 더 뜨거웠던 시절, 세계를 제패했던 전설 조훈현과 그의 제자 이창호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다. 승리를 쟁취했지만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는 제자와 자신의 제자에게 패한 스승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조명하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두 인물의 섬세한 감정선을 그려냈다.
이병헌은 대한민국 최고의 바둑 레전드 조훈현 역을, 유아인은 거대한 벽 같은 스승 조훈현을 넘어서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제자 이창호 역을 맡아 처음으로 연기 호흡을 맞췄다. 탄탄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매 작품 캐릭터에 맞게 새로운 얼굴을 꺼내는 두 배우의 만남으로 제작 단계부터 많은 기대를 모았다.
지난 2021년 촬영을 끝내고 2023년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시청자들과 만날 예정이었지만, 유아인의 마약 투약 혐의가 불거지면서 작품 공개가 불투명해진 것. 이후 새로운 배급사 ㈜바이포엠스튜디오가 '승부'를 인수하면서 마침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됐다.
이렇게 개봉 전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됐지만, 결국 이야기의 진정성과 배우들의 열연으로 관객들의 닫힌 마음을 여는 '승부'다. 이병헌은 실존 인물과 놀라운 싱크로율을 자랑하고, 유아인은 특유의 섬뜩하고 광기 어린 얼굴을 지우고 어리숙하다가도 우직하게 성장하는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또 한 번 대체 불가한 존재감을 입증한다. 주연 배우이자 한 사람으로서 책임감 없는 행동으로 인해 이창호 그 자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직접 들을 수 없는 게 아쉬울 뿐이다.
스승과 제자이면서 라이벌일 수밖에 없었던 대결과 이를 통한 성장을 보여주고 싶었던 메가폰의 기획 의도에 따라 유아인은 편집 없이 등장하고,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이러한 선택을 충분히 납득할 수밖에 없다. 조훈현과 이창호가 된 두 배우는 고요한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의 돌로 치열하게 경기를 펼치면서 뜨겁고 차가운 각기 다른 에너지로 맞부딪혀 숨 막히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여기에 이창호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김강훈을 비롯해 고창석 현봉식 문정희 조우진 등도 각자 맡은 역할을 잘 소화하며 극을 풍성하게 만든다.
그 자체로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는 아니지만, 다양한 카메라 구도와 음악의 힘을 더해 리드미컬하게 전개하면서 보는 것만으로도 숨 막히는 긴장감을 유발하는 연출의 힘도 눈에 띈다. 생소한 바둑 용어를 자막으로 설명하고 캐릭터들을 해설 위원처럼 사용하면서 바둑을 몰라도 영화를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게 한다. 물론 바둑을 안다면 더욱 다채롭게 즐길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때 그 시절을 함께했던 관객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조훈현과 이창호의 이야기를 잘 몰랐던 관객들에게는 바둑의 매력과 함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실화의 힘을 제대로 알려주는 영화가 될 듯하다. 예상치 못하게 여러 상처를 입은 작품이지만, 결과적으로 OTT가 아닌 극장 개봉은 영화를 더 몰입해서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됐다.
㈜바이포엠스튜디오는 주연 배우 곽도원의 음주 운전으로 인해 개봉이 연기됐던 '소방관'을 누적 관객 수 385만 명을 동원하며 그해 개봉한 한국 영화 흥행 TOP6에 이름을 올리는 쾌거를 거뒀고, '히트맨2'도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새로운 존재감을 발산했다. 과연 '승부'를 인수한 ㈜바이포엠스튜디오가 이러한 흥행세를 이어가며 침체기가 계속되고 있는 한국 영화계의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을지도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 12세 이상 관람가이며 러닝타임은 114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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