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성지연 기자] 어떤 수식어보다 필모그래피 자체로 말해주는 배우 설경구(47)와 박해일(38)이 뭉쳤다. 소재는 남북정상회담 전에 대통령과 리허설을 위해 김일성을 연기하는 무명배우와 그 아들의 이야기다. '천하장사 마돈나'(2006년), '김씨 표류기'(2009년) 등 전작에서도 독특한 소재로 이야기를 풀었던 이해준 감독이 5년 만에 메가폰을 잡았다.
개봉 전부터 '나의 독재자'는 믿고 볼만한 배우의 캐스팅과 신선한 소재로 예비관객에게 기대감을 선사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본 영화는 다소 허술한 스토리 전개가 허탈한 뒷맛을 자아낸다. 그나마 위안을 주는 건 김일성으로 분한 설경구와 그의 아들로 분한 박해일의 '쫄깃한 연기호흡'이다.

영화 '나의 독재자'(감독 이해준, 제작 반짝반짝영화사,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는 첫 남북정상회담 당시 리허설을 위해 김일성 대역이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작품이다.
무대 위 주인공을 꿈꾸던 무명배우 성근(설경구 분)은 우연한 계기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김일성의 대역 오디션에 합격한다. 생애 첫 주인공이 된 성근은 일생에 단 한 번 찾아온 기회를 잡아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그는 밀폐된 공간에서 비밀스럽게 이뤄지는 '김일성 만들기 프로젝트'를 통해 말투부터 제스처 하나까지 김일성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성근이 기다리며 연습했던 무대인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고 그는 제 연기를 보여줄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일상으로 돌아온다. 결국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자 했던 성근은 그 충격으로 김일성이란 배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로부터 20년 뒤, 훌쩍 큰 성근의 아들 태식(박해일 분)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 태식에게 아버지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지만, 속수무책으로 변해버린 아버지는 태식에게 '인생의 짐'으로 변한 지 오래. 정상적이지 못한 아버지 탓에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낸 태식은 변변한 직업 없이 다단계 판매로 생계를 이어가고 빚 독촉에 하루하루를 위태롭게 연명한다.
결국 산더미같은 빚은 태식의 목을 죄어오고 태식은 빚 청산을 위해 아버지의 유일한 유산인 집을 팔고자 요양원에 있는 아버지를 데리고 유년시절을 함께 했던 옛날 집으로 돌아온다. 온전하지 않은 아버지를 구슬려 인감도장을 받아내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그렇게 20년 만에 부자(父子)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포장만 보자면 '나의 독재자'는 남북정상회담과 김일성 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20여 년간 '독재자'로 살아왔던 아버지 성근을 이해할 수 없던 아들 태식이 우연한 계기로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아버지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절대 소통하지 못할 것 같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부분은 굵직한 감동을 선사한다. '나의 독재자'에서 녹여내는 아버지와 아들의 특별한 '가족애'는 특유의 무뚝뚝한 애정표현 덕택에 더욱 극적인 면면이 도드라진다.
영화의 가장 큰 무기는 소재의 신선함과 주인공으로 나선 설경구-박해일의 카멜레온 같은 연기력이다. '박하사탕' '오아시스'를 시작으로 지난해 '소원' '감시자들'까지 다양한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신뢰를 더한 설경구는 이번 작품을 통해 또 한번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얻는 데 성공했다.
최근 <더팩트>와 인터뷰에서 "호흡이 긴 작품이 그리워 '나의 독재자'를 선택했다"던 설경구는 배우를 꿈꾸는 평범한 아버지 성근부터 김일성 캐릭터에 완벽하게 빠져든 '독재자'까지 무리 없이 소화했다. '역도산'에서 일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했던 설경구에게 북한 사투리를 연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그의 말처럼 '나의 독재자'에서 김일성에 빠져든 성근을 녹여낸 설경구는 말투부터 몸매 분장 하나까지 뭐하나 어색하지 않을 정도라 놀라움을 자아낸다.
그뿐만 아니다. 설경구가 노인분장을 하고 긴 호흡으로 '리어왕' 대사를 독백 연기로 소화하는 부분은 '나의 독재자'에서 놓쳐선 안될 '최고의 장면'으로 꼽힌다. 그만큼 설경구는 이번 작품을 통해 또 한번 그가 어떤 배역이든 안정적인 연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설경구의 아들 태식으로 나온 박해일은 특유의 '동안 외모'를 장점으로 발휘했다. 실제로 설경구와 나이 차이가 9살밖에 나지 않는 박해일이지만, 노인분장을 한 설경구 앞에서 그는 철없는 아들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준다. 박해일은 "설경구 선배와 부자 호흡을 맞추려니 걱정됐지만, 막상 함께 하니 생각보다 자연스럽더라"며 무리 없이 연기했다고 밝혔다.
박해일 또한 그간 '은교' '최종병기 활' '이끼' '살인의 추억' '제보자' 등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막힘없이 소화한 바 있어 그에 대한 관객의 믿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맡은 배역은 늙은 할아버지부터 어린 소년까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중복되는 것이 없기 때문. 그만큼 모든 배역을 '박해일 스타일'로 유연하게 녹이는 그는 태식 또한 자신의 것으로 능청스럽게 연기했다. 전작 '제보자'에서 진실을 파헤치는 시사프로그램 PD를 연기했던 그는 다단계 판매를 하는 태식으로 분해 복고풍 의상을 입고 철없는 코믹연기로 극의 완급을 조절한다.

'능숙한 연기자' 박해일에게 기대한 면면들은 새롭진 않다. 하지만 '나의 독재자' 말미에서 박해일은 영리하게 조절하던 호흡을 뜨겁게 분출한다. 태식이 어린아이처럼 우는 장면에서 박해일이 보여주는 눈물 연기는 그가 지금껏 보여준 여느 눈물과는 달라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하지만 127분이란 짧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부드럽지 못한 전개는 '나의 독재자'가 가진 치명적인 단점이다. 초반 성근이 김일성 대역을 맡게 된 이유-어린 태식과 추억을 담는 부분은 빠른 전개로 탄탄하게 흘러가지만, 20년 뒤 어른이 된 태식이 등장하면서부터 엉성한 면면이 도드라진다. 초반 장대하게 시작한 이야기가 결말에서 뒷심 부족으로 초라하게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그 탓에 아버지 성근이 오랜 시간 김일성으로 살아온 이유가 20년 만에 밝혀지고 태식이 뒤늦게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되는 극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관객들에게 극적인 감동을 선사해야 하지만, 뜨뜻미지근하다. 비중있게 등장하는 태식의 연인 여정(류혜영 분)의 설익은 연기력까지 합세해 극의 흐름을 뚝뚝 끊어놓는다. 극의 말미에서 의지할 것은 설경구 박해일의 '힘있는 연기력'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에 남북정상회담이란 독특한 소재를 적절히 섞었다. 이해준 감독의 독특한 시선이 오롯이 묻어난다. 하지만 주 무기는 설경구와 박해일의 카멜레온 같은 연기력이다. 느슨한 전개가 조금 아쉽지만, 개봉 전까지 조금 더 편집을 다듬는다고 하니 기대해 볼 만하다. 오는 30일 개봉한다.
◆ 영화 '나의 독재자' 메인예고편(=http://www.youtube.com/watch?v=OodUAaM73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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