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연 기자] 애초 영화 '하이힐'(감독 장진, 제작 장차앤코,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은 작품의 내용보다 배우 차승원(44)과 영화감독 장진(44)이 6년 만에 재회로 대중들의 관심이 쏠렸다.
지난 2005년 '박수칠 때 떠나라'와 2007년 '아들'로 찰떡 호흡을 자랑했던 두 사람의 만남이 빚어낼 작품은 이름값으로 만으로도 사람들의 눈과 귀를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특히 장진 감독은 최근 국내 스크린에서 유행하는 장르인 누아르를 선택했기에 더욱 그랬다. 차승원과 누아르는 어울릴 법한 조합이었지만, 장진에겐 처음으로 도전하는 장르였다.
하지만 베일을 벗겨본 '하이힐'은 누아르를 덧입은 '퀴어시네마'에 가깝다. 다양한 분야에서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며 국내 대표적인 '문화 게릴라'로 손꼽히는 장진 감독다운 파격적인 발상이다. 대중들에게 익숙한 누아르 장르를 통해, 가장 남자다운 배우 차승원을 통해 낯섦을 친숙하게, 남자를 여성으로 변화시켰다.
'하이힐'은 완벽한 남자의 조건을 모두 갖췄지만, 여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숨긴 채 살아야 하는 강력계 형사 지욱(차승원 분)의 운명과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다.
강력계 형사 지욱은 탄탄한 근육질 몸매와 타고난 운동 실력으로 경찰은 물론 거대 범죄조직 사이에서 '전설'로 불리는 인물이다. 지욱은 무기나 수갑 없이 맨손으로 범인을 제압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칼을 든 수십 명의 조직 폭력배를 상대로 맨손으로 싸우며 순식간에 상대를 제압하는 장면은 입을 떡 벌어지게 한다. 싸움이 끝난 현장은 그야말로 '피투성이'지만, 지욱은 태연한 미소로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는 유일한 존재다.
말로만 들었던 '전설'적인 형사 지욱은 후배 형사 진우(고경표 분)에겐 존경스러운 선배다. 진우는 지욱을 '형님'이라 부르며 동료 이상의 끈끈한 의리를 과시한다. 이들의 관계는 여성 관객들에게 '사나이들의 우정'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또 지욱의 부탁으로 범인을 소탕할 때 바람잡이 '알바'를 해주게 된 묘령의 여인 장미(이솜 분)도 그를 좋아하긴 마찬가지. 시종일관 무뚝뚝한 지욱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정하고 따뜻한 그의 매력은 젊고 매력적인 장미도 호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이렇듯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지욱이지만, 그에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내면 깊숙하게 여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꿈틀 거리는 것. 사실 지욱은 여자가 되길 꿈꾸는 겉만 남자인 '여자'다.
지욱은 자신의 '그녀'를 부정하기 위해 더욱더 거친 남자로 살아간다. 하지만 본능에서 벗어나려 애를 쓸수록 그 안의 '그녀'는 지욱에게 더욱 큰 욕망으로 다가온다. 결국, 지욱은 모든 것을 버리고 진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영화는 지욱이 '자신이 원하는 삶' 즉, 성별이 남자인 지욱이 여자가 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생기는 일련의 사건들을 잔인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담아낸다. '남자 지욱'이 여자를 꿈꾸며 집에서 홀로 진한 화장을 하고 드레스를 입는 것은 그저 '놀이'에 불과했지만, 그가 진짜로 여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영화는 심각해 진다. 그리고 그 심각한 전개 속에서 지욱의 애처로운 고군분투는 관객들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잠시나마 자신이 원하는 예쁜 옷을 입고 곱게 화장을 한 채 거울을 바라보는 지욱의 행복한 미소, 그리고 그런 그는 "예쁘다. 그리고 부럽다. 남들이 한 번 사는 인생 선배는 두 번 산다"며 따뜻한 응원을 건네는 후배 진우의 응원은 차가운 현실에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이힐'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은 배우들의 열연 덕분이다. 다만 차승원의 파격적인 여장은 다소 부담스럽다. 오죽하면 차승원 본인도 "(여장은) 견뎌내야 하는 과정이었다"며 여장 당시를 회상하며 고개를 저었다. 장진 감독 또한 "스태프 100명과 함께 '웃지 말자'고 서로 무언의 다짐을 했다. 끔찍한 순간이었다"며 여장한 차승원의 외모를 묘사할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부담스러운 여장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것은 '믿고 보는' 차승원의 탄탄한 연기력이다. 다부진 몸, 굵은 목소리로 내면에 여성을 품고 사는 지욱을 녹여내는 그의 처연한 눈빛과 자연스러운 여성스러움은 관객들을 웃을 수 없게 한다.
오정세 박성웅 이솜도 '하이힐'의 숨은 공신이다. 극 중 조직폭력배 허곤으로 분해 차승원과 대립각을 세우는 그는 코믹한 연기부터 잔인한 야수의 눈빛까지 팔색조 매력을 마음껏 내뿜으며 극의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그가 다소 모자란 길이의 팔·다리로 차승원의 화려한 무술을 따라 하는 장면과 눈을 부라리며 "죽여"라고 악다구니쓰는 장면은 놓쳐선 안 된다.
박성웅은 조직 폭력배가 아니다. '의외로' 검사로 분한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량하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박성웅은 스스로 '껌 꽤나 씹어본' 새로운 스타일의 검사를 만들어 제 몫을 톡톡히 했다. 이솜은 묘령의 여인 장미로 분해 지욱의 마지막 운명을 흔드는 비밀스러운 '열쇠'로 작용한다.
보너스는 또 있다. 188cm의 큰 키를 자랑하는 차승원이 우산 200개를 부러뜨려가며 찍은 액션은 시원하고 화려하다. 이 외에도 풍성한 액션장면은 장진 감독의 세밀한 연출이 돋보인다. 총천연색 색감과 다양한 무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이힐'의 장르는 남성 관객이 선호하는 누아르 영화다. 하지만 여성 관객에게 더 많은 호평을 얻을 듯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작품의 장르가 아닌 작품이 가진 메시지다. '하이힐'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지만 음지에 서야만 했던 '소수의 그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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