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시의 그늘 下] 전문 인력 0명·컨설팅 '표류'…실효적 대안은?
  • 이한림 기자
  • 입력: 2026.02.24 00:00 / 수정: 2026.02.24 00:00
'채찍과 당근' 절실…시장 소통 '질적 변화' 우선 목소리도
23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오는 5월 말까지 지배구조보고서 공시를 해야 하는 자산 5000억원 이하 코스피 상장사 공시 담당자들은 애를 먹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더팩트 DB
23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오는 5월 말까지 지배구조보고서 공시를 해야 하는 자산 5000억원 이하 코스피 상장사 공시 담당자들은 애를 먹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더팩트 DB

[더팩트ㅣ이한림 기자] 정부가 추진하는 공시 의무화의 종착역은 시장 질서 확립이다. 투자자 보호, 시장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고 글로벌 규제 환경에 대응해 선진 증시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기 위함이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인력 부족을 넘어 정책의 실효성 우려나 질적 저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문 인력이 없다시피 한 중소 상장사들이 외부 회계법인이나 컨설팅업체에 공시 관련 사실상 대필을 맡기면서 기업의 실제 내부 사정과는 동떨어진 보고서가 양산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2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중소 상장사들은 확대되는 공시 범위를 감당할 내부 전문 인력이 부족한 실정이다. 자산 5000억원 이하 상장사까지 확대된 지배구조보고서 공시부터, 도입이 임박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관련 공시 업무 등까지 기존 공시 담당자나 회계 인력이 추가로 떠맡아 업무 과부하를 호소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현장에서는 외부 컨설팅업체에 공시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이 빈번하다. 일부 중소 상장사들 사이에서는 건당 50만원 안팎의 비용으로 보고서를 처리하는 대필이 성행하는 셈이다.

상장사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행정적 의무를 채우고 업체도 낮은 단가에 맞춰 의무를 지키는 게 낮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타 기업의 사례를 짜깁기한 결과물을 내놓고 공시의 질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실정이다.

문제는 이러한 공시 행태가 정보 왜곡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주주가 공시를 보고 기업의 흥망성쇠를 함께 하거나 투자자도 해당 기업의 고유한 리스크나 비전 등을 공시를 통해 확인해야 하는데, 제도를 지키기 위한 식의 공시가 만연하다면 가치 판단이 어려울 수 있다는 해석에서다.

전문가들은 공시 의무화가 시장에 안착하기 위해 기업이 스스로 공시 품질을 관리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병행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단순 공시 항목을 늘리는 양적 행정보다 기업이 공시를 시장과 소통 창구 인식하는 질적 변화가 우선이라는 제언이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공시 핵심은 숫자에 담기지 않는 기업의 투명성을 드러내는 것인데, 현장에서 다루는 공시 업무에 대한 행태는 오히려 기업의 실체를 가리는 가림막이 될 수 있다"며 "비용과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에 의무화만 강조하면 제도와 현장이 따로 노는 표류 현상이 심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공시 내실화의 필요성은 올해 코스피가 연일 고점 경신으로 6000선을 바라보면서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진은 코스피가 5800선을 넘어선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전광판에 지수가 나타나는 모습. /박헌우 기자
공시 내실화의 필요성은 올해 코스피가 연일 고점 경신으로 6000선을 바라보면서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진은 코스피가 5800선을 넘어선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전광판에 지수가 나타나는 모습. /박헌우 기자

구체적 대안은 제시되고 있다. 공시 실무 인력 양성이나 교육 지원에 대한 세분화다. 상장사 관련 협의회 등 관계기관을 통해 산업별 규모 특성을 반영한 표준 모델, 즉 가이드라인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중소 상장사들의 공시 작성 부담을 낮춰야 한다는 분석이다.

또 다른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투자자가 공시를 믿지 못하는 순간 시장의 질서는 무너질 수 있다"며 "대필 공시가 양산되는 현상을 방치한다면 선진 증시로 도약은커녕 시장의 불신만 키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채찍과 당근'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감지된다. 공시 의무화를 지키지 않으면 페널티를 받은 불성실 공시에 대한 제재금 수위를 현실화해 기업의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반면 공시 품질이 우수한 기업에 주는 혜택이나 상장 수수료 감면, 정기 조사 면제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해 자발적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는 견해도 뒤따른다.

공시 내실화의 필요성도 언급된다. 최근 요동치는 국내 증시 상황과 맞물려 더욱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23일 코스피는 장중 역대 최고치인 5900선을 넘어섰다. 증시가 사상 최고치 부근에서 변동성을 키울수록 기업의 정확한 정보 공개가 투명한 가치 판단의 척도가 돼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외부 변수보다 꾸준히 우상향하는 장세에서 투자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지표는 결국 기업이 내놓는 공시라는 해석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공시 관련 담당자는 "공시 의무화의 목적이 단순한 정보 공개에 그쳐서는 안 된다. 기업이 규제에 쫓겨 숙제하듯 보고서를 쓰는 환경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투명성 제고 취지는 반쪽짜리에 그칠 수밖에 없다"며 "정부 정책이 성공하려면 속도전보다는 내실이 중요하다. 숙제하듯 써 내려간 보고서는 시장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의무화를 앞두고, 중소 상장사들이 참여를 선택할 수 있는 정교한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2kuns@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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