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혁·양민혁·박승수...태극마크를 잃은 자의 그라운드 [이영규의 비욘더매치]

  • 이영규 기자
  • 입력: 2026.11.04 00:00 / 수정: 2026.11.04 00:00
병역 특례 논란 이후 대표팀 명단에서 잇따라 제외
국가대표로서 사명감 가볍게 여긴 대가…결국 되찾아야 할 것은 팬들의 신뢰
아시안게임 축구대표팀 주장 이기혁이 지난 10월 4일 인천공항에서 귀국 인터뷰를 하고 있다./KFA
아시안게임 축구대표팀 주장 이기혁이 지난 10월 4일 인천공항에서 귀국 인터뷰를 하고 있다./KFA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라는 화려한 성과 뒤에 남은 것은 축하와 환호만이 아니었다. 병역 특례를 둘러싼 부적절한 언행으로 논란을 빚었던 선수들에게는 차가운 냉소와 팬들의 불신이 뒤따랐다. 최근 잇따라 발표된 국가대표팀 명단에서도 이들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3경기에 모두 선발 출전하며 한국 수비의 새로운 자원로 주목받았던 이기혁(26·강원FC)은 모레노호 2기 명단에서 제외됐다. 프리미어리그 토트넘과 뉴캐슬 유나이티드 진출로 화제를 모았던 양민혁(20)과 박승수(19) 역시 2일 발표된 2028 LA 올림픽을 준비하는 김은중호 U-21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선수 선발권을 가진 감독은 경기력 및 전술적 판단을 내세우고 있지만, 대중의 시선은 이번 명단 제외를 단순한 경기력 평가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기혁의 경우 함께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던 수비수 신민하(21·강원FC)와 김지수(21·브렌트포드)가 모레노호에 발탁된 점을 고려하면, 병역 특례 발언 논란이 선발 판단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양민혁과 박승수 역시 그동안 한국 축구의 미래로 주목받으며 자신들보다 두 살 이상 많은 선수들과 함께 이민성 감독이 이끌던 U-23 대표팀에 꾸준히 발탁됐던 유망주들이다. 두 선수 모두 올림픽 출전이 가능한 연령대인데도 이번 김은중호 명단에서 제외된 것은 단순한 경기력이나 전술적 판단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태극마크가 지닌 엄중한 무게를 경시하고 국민의 신뢰를 스스로 저버린 선수들에게 국가대표라는 자격이 더 이상 당연하게 주어질 수는 없다는 냉정한 평가다.

양민혁이 아시안게임 결승전을 마친 뒤 소속팀 베스테를로에서 마련한 지난달 7일 환영행사에서 감독으로부터 꽃다발을 받아들고 활짝 웃고 있다./베스테를로 구단 SNS 캡처
양민혁이 아시안게임 결승전을 마친 뒤 소속팀 베스테를로에서 마련한 지난달 7일 환영행사에서 감독으로부터 꽃다발을 받아들고 활짝 웃고 있다./베스테를로 구단 SNS 캡처

국가대표팀은 단순히 축구를 잘하는 선수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태극마크는 한 사회가 해당 종목을 대표하는 선수에게 부여하는 최고의 영예이자 국민적 신뢰의 상징이다. 따라서 대표팀 승선 실패는 단순히 국가대표 경기 출전 기회를 잃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국제 무대에서 자신의 기량을 증명하고 선수로서 커리어를 확장할 기회를 잃는 것은 물론, 태극마크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사회적 신뢰와 명예에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대표팀의 보호막을 잃은 채 소속팀으로 돌아가 마주한 현실은 더욱 냉혹하다. 양민혁은 2024년 12월 토트넘 합류 이후 퀸즈 파크 레인저스(QPR), 포츠머스, 코번트리 시티를 거쳐 현재 벨기에 베스테를로까지 네 차례 임대 구단을 옮겨 다니고 있다. 박승수 역시 뉴캐슬 합류이후 3시즌째 뉴캐슬 유나이티드 U-21팀에서 뛰며 아직 1군 진입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소속팀에서 이들이 보여준 모습은 팬들의 실망을 더욱 키웠다. 양민혁은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고 베스테를로에 복귀한 뒤 구단의 환영을 받았고, 지난 12일 로열 앤트워프전에서는 후반 40분 교체 투입돼 추가시간 데뷔골까지 터뜨렸다. 경기 후 현지 매체와 인터뷰에서 "어쩌면 인생 최고의 득점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박승수 역시 지난 27일 뉴캐슬 U-21팀의 프리미어리그2 선덜랜드 U-21팀전에서 득점한 뒤 기타 연주를 흉내 내는 특유의 세리머니로 골을 자축했다. 그러나 병역 특례를 둘러싼 논란이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두 선수의 밝은 표정과 세리머니는 팬들의 정서와 동떨어진 모습으로 받아들여졌다. 앞서 사과의 뜻을 밝혔음에도 논란 이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판이 이어진 이유다.

박승수가 지난달 27일 선덜랜드 U-21팀과의 경기에서 골을 터뜨린 뒤 기타치며 춤을 추는 동작으로 골을 자축하고 있다./ 박승수 SNS 캡처
박승수가 지난달 27일 선덜랜드 U-21팀과의 경기에서 골을 터뜨린 뒤 기타치며 춤을 추는 동작으로 골을 자축하고 있다./ 박승수 SNS 캡처

반면 국내 무대에서 강원FC의 주전으로 뛰는 이기혁은 그라운드에서 공을 잡을 때마다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싸늘한 야유를 감내해야 했다. 해외 무대에서 활동하는 두 선수와 달리 국내 팬들의 반응을 경기장 안에서 고스란히 마주해야 하는 처지다. 논란 이후 팬들과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으며, 이러한 심리적 압박은 경기력에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외 진출이 논란을 벗어날 손쉬운 돌파구가 될 수는 없다. 현대 프로축구에서 해외 구단의 선수 영입은 기술과 신체 조건뿐 아니라 경기장 안팎에서 보여주는 프로 의식과 훈련 태도, 팀 적응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국내 팬들의 신뢰를 잃은 사실 자체가 해외 진출을 가로막는 직접적인 요인은 아니지만, 새로운 무대에서도 경기력은 물론 프로다운 자세에서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

실제로 양민혁은 임대 구단인 베스테를로의 샤라이 감독으로부터 경기와 훈련 태도에 대해 공개적인 지적을 받았다. 아시안게임 복귀 이후 데뷔골을 터뜨렸지만 주전 경쟁에서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손흥민 역시 양민혁의 토트넘 입단 당시 유럽 무대의 경쟁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취지의 조언을 한 바 있다. 결국 재능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경쟁의 벽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경기장 안팎에서 프로다운 자세와 꾸준한 자기 관리가 뒷받침돼야 한다.

종목은 다르지만, 박찬호나 김연경, 류현진 등 과거 한국 스포츠를 빛낸 선수들이 해외 무대에서 활약한 뒤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팬들의 뜨거운 환영과 박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시간 경기장에서 보여준 성과와 헌신으로 팬들의 신뢰를 쌓아왔기 때문이다.

국가대표로서의 사명감과 태극마크의 명예를 가볍게 여기고 팬들의 신뢰를 스스로 저버린 선수들에게도 그런 영예로운 귀환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득점 뒤의 웃음과 관중석의 야유가 교차하는 그라운드에서 이들이 되찾아야 할 것은 또 다른 골이나 새로운 무대가 아니라, 스스로 무너뜨린 팬들의 신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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