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ㅣ인천=김형수 선임기자]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국민의 참정권을 짓밟은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의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 한다. 독립기관이라는 이유로 감사원의 회계감사, 직무감찰 등을 거부할 정도로 초월적 지위를 행사한 선관위의 파행을 어물쩍 넘기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번 투표용지 사태는 다시 부정선거 음모론의 불씨를 지폈다. 그동안 부정선거 음모론은 정쟁의 대상이고, 분열의 원인이 되어왔지만 선거 시스템 등이 조작된 사례가 실증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나 사법부의 심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보수 진영에서의 선거 불신은 사그라질 기세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훼손되지 않고 선거의 신뢰를 높일 수 있는 건전한 비판을 수용하되 확증편향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 침해 여부에 대한 헌법소원이 헌재에서 조속히 판단돼 초유의 국민 권리 침해 사태가 명백히 밝혀져야 한다.
선관위의 자정과 혁신도 선행돼야 한다. 특히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반발이 부정선거 음모론 분위기와는 달리 2030 젊은 세대들이 주도 세력으로 등장한 시위 현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1980~1990년대 대학가의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386세대 이후 전국 대학가에서 선관위를 규탄하는 성명과 대자보가 확산됐다. 5일 전국 100여개 대학으로 구성된 전국총학생회협의회는 '헌법기관의 참정권 강탈'에 대해 "민주주의를 지켜온 학생자치의 이름으로 침묵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 한국외대·경희대·서울시립대·경기대에 이어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서강대·성균관대·중앙대·동국대·명지대·상명대·인하대·가톨릭대·전남대·부산대·충북대·순천향대 등에서도 선관위에 대한 규탄 성명이 잇따랐다.
인하대 문과대학생회(명문)는 총학생회와 중앙집행연석회의에 이은 별도의 성명에서 이번 사태가 "정쟁의 수단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었는가라는 본질적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의 몇 몇 역대 정권에서도 부정선거 음모론이 당리당략에 이용됐기 때문에 정치적 관점에서 벗어나 공정한 국민의 삶이 보장돼야 하는 민주주의의 절차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3일 본투표 당일 투표용지 부족 투표소는 전국 50곳이었고, 이 중 22곳에서 투표가 일시 중단된 것으로 나타났다. 인천시 연수구 동춘1동과 송도5동 투표소에서도 투표용지가 부족해 차질을 빚었다. 이와 관련 3선 도전에서 실패한 유정복 인천시장은 7일 시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개헌을 통해 선관위를 전면 개편하고, 사전투표 제도를 폐지할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이번 인천시장 선거에서 연수구 송도1동과 송도2동 사전투표에서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3030표, 유정복 국민의힘 후보가 1440표로 서로 다른 2개의 사전투표소의 득표가 동일하게 집계됐다. 본투표에서는 송도1동에서 박 후보 5139표, 유 후보가 7692표를 얻었고, 송도2동에서는 박 후보 4322표, 유 후보 6660표를 득표했다.
통계전문가들은 "우연히 발생할 수 있는 범주의 흥미로운 현상"이지만 "오류나 부정 행위를 속단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다. 인천선관위는 "집계 오류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의혹을 불식할 인천선관위의 설명을 기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크다.
선관위는 3·15 부정선거 등을 겪으며 헌법이 보장하는 독립기관으로 설립됐다. 사법·입법·행정부와 달리 감사를 받지 않고, 대통령의 통제에서도 자유로운 헌법기관이다. 그러나 최근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 국민의 비판 대상이 됐다. 고위 간부 자녀 채용 비리, 현수막 논란, '소쿠리 투표'에도 사퇴하지 않았던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사퇴했다.
선관위에 대한 개혁은 미룰 수 없는 국가 과제가 된 셈이다. 중앙선관위원의 상임위원 확대 등 인사혁신이 우선이다. 여야가 의견을 모아 특검·국정조사를 실시하고, 곪아터진 선관위를 해체하는 대변혁이 필요할 뿐이다.
투표의 공정성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이다. 그럼에도 잠실 개표소 앞 시위 집단을 보면 부실 선거관리에 분노한 청년 시민들의 여론은 일파만파로 장기화될 공산이 크다. 선거 디테일을 점검할 때다. 이재명 대통령의 돌발적인 사전 투표용지 공개도 디테일에 있었다. '신'보다는 '악마'의 디테일에 가까운 결과를 남겼다.

infact@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