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이우탁 칼럼니스트]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에서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같이 미국을 정점으로 한 집단안보체제인 '태평양동맹'(Pacific Pact)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1949년 3월 필리핀의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이 아시아에서도 ‘태평양동맹’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즉각 ‘찬성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필리핀과 한국에 이어 국공내전을 겪던 중화민국의 총통 장제스(蔣介石)도 적극 호응했습니다. 3국의 지도자들은 1949년 여름 진해와 필리핀 바기오 등에서 회담한 뒤 아시아 각국에 태평양 동맹 결성에 참여해줄 것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태평양동맹 결성은 결국 무산됐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아시아 각국이 일본 참여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이듬해에는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6·25 전쟁은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반공 동맹전선을 강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그 양태는 집단안보체제 대신 한국과 일본 등과 양자동맹을 체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1980년대말 사회주의 맹주국인 소련이 붕괴하자 미국은 이제 유일한 세계 최강국이 됐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욱일승천한 중국이 2010년내 중반이후 미국의 세계패권에 도전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의 아시아 전략은 근본적으로 수정됩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이후 현재까지 미국은 중국을 포위하고 압박하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동맹과 함께 중국을 포위 압박하는 ‘통합억제’ 전략도 펼쳐졌고, 인도와 일본, 호주를 묶어 쿼드(Quad) 안보협의체를 가동하기도 했습니다. 갈수록 중국 포위망이 견고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집권 2기를 시작한 트럼프 대통령은 더욱 거세게 중국을 다룹니다. 이런 와중에 일본이 적극 움직입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지난해 9월 미국 허드슨 연구소에 기고한 ‘일본 외교정책의 장래’라는 글에서 중국을 억지하고 중국과 러시아, 북한 핵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아시아판 나토’를 창설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또 지난 4월30일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은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관에게 "일본과 미국, 호주, 필리핀, 한국을 포함하는 하나의 전구(戰區·Theater)를 만들자"는 구상을 제시했습니다. 전구는 육상과 해상, 공중전이 전개되는 지리적 범위를 의미합니다. 미국이 이 제안에 적극 호응했다는 것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나토와 같은 집단안보체제가 가동하지 않는 동아시아 지역을 하나의 전구로 묶는다면 군사적 효율성을 강화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한반도와 대만해협이 동일 전구로 설정될 가능성이 큽니다.
일련의 과정을 보면 일본이 제안한 ‘아시아판 나토’ 창설이 미국의 지원 속에 탄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을 압박하고 끝내 굴복시키기 위해 과거 유럽에서 했던 것처럼 집단안보체제를 결성해 대응해나가자는 전략입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이미 지난 3월 임시국가방위전략지침(Interim National Defense Strategic Guidance)에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이 중국의 대만 침공 저지와 본토 방어를 최우선 과제임을 명시했습니다.
이 지침에서 미국은 ‘중국 이외의 위협’에 대한 대응, 다시말해 북한 등에 대한 대응은 동맹국에 넘긴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동맹국들의 방위비 증강을 더욱 강력히 요구하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는 북한군을 억제하는 주한미군의 역할 변화와도 연결됩니다. 최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라든지 ‘군대규모 감축’ 문제가 불거져 미묘한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대만 급변사태가 벌어지면 주한미군이 투입된다는 언론보도도 이어지고 있는데 적절한 기회에 다시 잘 살펴보겠습니다.
곧 미국 정부의 계획이 완성될 것으로 보입니다. 세계최강 미국이 아시아판 나토 창설에 적극 나설 경우 한국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갑작스런 조기대선으로 차기 정부는 인수위 없이 곧바로 임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올해 한반도 주변 안보상황은 심상치 않습니다. 중국은 대만을 겨냥한 무력통일 준비를 가속화하고 있고, 남중국해에서의 충돌도 자주 일어납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은 여전하고 북한까지 가세한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소식도 아직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 재정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세계경찰국가로서 역할 대신 동맹국들과 짐을 함께 지려는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과 ‘아시아판 나토 결성’ 문제에 대한 한국의 선택이 중대한 과제로 대두됐습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아시아에서 한때 전개됐던 ‘태평양동맹’이 끝내 무산된 이유는 현재 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철저하게 과거를 반성한 독일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는 일본에 대해 불편한 감정이 여전합니다.
그래서인지 한미 군사동맹의 강력한 울타리를 치고 있는 한국조차도 일본을 포함한 ‘한미일 3각 군사동맹’ 얘기를 꺼내기 힘든 게 현실입니다. 최근 한일 관계가 급속히 개선되고 있다고 하지만 잊을 만하면 터지는 과거사 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 등 폭발력있는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침 올해는 한일 국교수립 60주년입니다. 전략적 기로에 서게 될 차기정부가 새로운 안보질서의 공동 설계자로 나서 이 미묘한 문제에 대해 명확한 전략을 제시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