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김장하' 열풍...절망의 늪에서 희망을 긷는 사회 [박종권의 나우히어]
  • 박종권 언론인
  • 입력: 2025.04.15 00:00 / 수정: 2025.04.15 00:00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대행의 출연 장면이 소개되면서 뒤늦게 역주행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 김장하 포스터.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대행의 출연 장면이 소개되면서 뒤늦게 역주행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 김장하' 포스터.

[더팩트 ' 박종권 언론인] 영화의 누적 관객 수가 3만 명이면, 시쳇말로 ‘폭망’한 수준이겠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들이 즐비하지 않은가. 근육질 형사로 나오는 마동석의 '범죄도시'만 해도 세 편의 시리즈 모두 1000만명이 넘었다. 하지만 겨우 3만명을 갓 넘긴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이 북풍한설과 꽃샘 추위가 유난한 2025년의 봄을 훈훈하게 덥히고 있다.

물론 영화보다는 넷풀릭스로, 혹은 유튜브 짤막 동영상으로 접하는 이들이 더 많지만 말이다. 바로 <어른 김장하> 이야기이다. 사실 2023년 11월15일 개봉됐을 때만 해도 신문 기사 한 귀퉁이를 장식했을 뿐이었다. 네이버 평점은 9점대를 넘어 극찬을 받았지만 그저 알만한 이들만의 감동 공유에 머물렀다.

그랬던 것이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대행의 출연 장면이 소개되면서 뒤늦게 역주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라는 주문 선고로 안개 정국을 말끔하게 씻어내며 한국 사회에 희망을 빛을 던진 문 대행이 아니던가. 그가 자신에게 장학금을 준 독지가의 2019년 생일잔치에 참석해 눈시울을 붉히며 ‘말잇못’하는 장면이 전파를 탄 것이다.

문 대행은 영상에서 김장하씨에게 인사를 간 이야기를 소개한다. "자신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사회에 있는 것을 준 것이니 혹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사회에 갚아라"라고 했다는 거다. 그래서 자신이 사회에 조금의 기여를 한 게 있다면 (김장하의)말씀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연신 울먹이면서 뒤로 돌아 젖은 눈가를 가리면서 말이다. 시민들은 격한 감동을 느꼈던 듯하다. 절망에서 희망을 긷는 모습에 마음이 정화되는 카타르시스와 함께 일말의 안도감을 찾은 것일까. 사실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에서 4월 4일 파면 결정까지 불확실성이 얼마나 팽배했던가.

본디 예측 불가능성이 절망의 바탕이고 예측 가능성이 희망의 디딤돌 아니겠나. 어쩌면 절망과 희망은 동전의 양 면과 같을 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판도라의 상자' 신화가 그렇다. 그리스의 신화에서 제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한 프로메테우스가 못마땅했다. 불은 세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에게 진흙으로 여자를 빚으라 명했다.

이 여자에게 제우스는 생명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움을, 전령의 신 헤르메스는 말솜씨를, 예술의 신인 아폴론은 음악의 재능을 주었다. 여자의 이름은 판도라였다. 그리스어로 "모든 선물을 받은 여자"이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작은 상자를 주었다. 그러면서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인간은 본디 호기심의 동물이 아니던가. 판도라가 상자를 열자 온갖 재앙들이 쏟아져 나왔다. 욕심과 시기와 미움과 원한 같은 어둠의 속성들 말이다. 놀란 판도라가 얼른 뚜껑을 닫자 그 안에 마지막으로 희망이 남아 있었다. 결국 희망을 꺼내면서 이 세상에 절망의 극복과 치유의 빛이 생겼다는 거다.

하지만 때론 희망이 고통이 되기도 한다. ‘희망 고문’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도 그렇다. 원래 '생각하는 사람'은 독립된 조형작품이 아니다. 그의 '지옥의 문'이라는 거대한 작품의 일부분이다. 높이 6.35m에 폭이 3.98m로 무게가 7톤이 넘는 청동 조형물이다. 저작권은 프랑스 정부에 있는데, 한국에는 7번째 작품이 있다. 2016년 8월까지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에 전시됐다가 지금은 삼성의 미술관 수장고에 있다.

이 '지옥의 문'에는 배고픔으로 자녀들의 인육을 먹어 지옥에 떨어진 우골리노 백작과 죽음의 키스로 지옥행을 맞은 불륜의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조각이 새겨져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보며 고통에 잠긴 사람의 모습이다. 지옥문의 바로 위에서 지옥을 내려다보는 구도이다. 이 지옥문에 가장 절망적인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여기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그래서 그럴까.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근육이 경직돼 있고 발가락까지 오므린 모습이다. 지옥의 원관념은 이렇게 희망이 없는 세상이다. 2017년 탄핵의 강 저편에서 청년들이 "헬 조선"을 부르짖을 때 희망이 없는 한국을 탄식하는 것이었다. 현재도 미래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야 말로 지옥일 테니까 말이다.

탄핵의 강을 건너 8년이 지나 맞닥뜨린 탄핵의 늪도 그랬다. 외교안보와 세계 경제의 쓰나미 속에서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한 한국은 마치 희망이 사라진 절망의 늪으로 비쳐졌다. 여기에 문형배 대행이 희망이란 희미한 빛을 반사한 것이다. 여기서 희망의 발광체 김장하에 관심이 쏠렸다.

어른이 사라진 시대, 장로가 실종된 시대에 스스로 희망이 빛이 된 인물 말이다. 그는 경남 진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번 돈을 평생동안 사회에 기부했다. 학교를 지어 국가에 헌납하고, 가난한 수많은 학생들에게 고교와 대학 학비를 지원했다. 그의 장학생 중 한 명이 문 대행인 거다.

김장하 선생은 2022년 5월31일 약방 문을 닫고 은퇴했다. 그의 제자들이 전한 김장하의 돈에 대한 신념은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이겠다. "돈은 똥과 같다. 모아 두면 악취를 풍기지만 밭에 골고루 뿌리면 거름이 된다." 그렇다. 돈을 쌓아두고 자녀들에게 상속할 것만 생각하는 몇몇 재벌은 우리 사회에 악취를 풍기지 않던가.

사실 김장하 선생 같은 분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을 것이다. 탄광사업으로 돈을 벌어 교육사업에 쓴 ‘건달 할배’ 채현국 선생도 있고, 거의 1조원에 가까운 사재를 털어 국내 최대규모 장학재단을 세운 관정 이종환 선생도 있다. 비록 돈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혼과 정성으로 사회에 빛과 밀알이 된 분도 허다하다.

맹자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을 말했다.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여기에 천하의 왕이 되는 것은 들어있지 않다고 했다. 첫째가 부모가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다. 둘째가 하늘에도 사람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셋째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즐거움에 천하의 왕은 들어있지 않다.

김장하 채현국 이종환 선생 모두 직접 교단에 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몸소 실천함으로써 후대에 가르침이 된 것이 아니겠나. 그런 점에서 첫째는 몰라도 둘째와 셋째 즐거움은 누린 셈이겠다. 주목할 것은 맹자가 군자삼락을 말하면서 처음에도 마지막에도 "천하의 왕은 들어있지 않다"고 두 번 강조한 것이다.

현대로 치환해 보면 대통령이란 자리와 역할은 본원적인 즐거움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겠다. 돌아보면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어쩌면 ‘천하의 왕’은 판도라의 상자에서 튀어나온 욕망과 시기와 원한과 복수 같은 재앙에서 태어난 것 아닐까. 절망에 대해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불안의 심연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결정할 수밖에 없는 절실한 실존이 피할 수 없는 현상 중 하나이다. 이런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절망에 용기 있게 맞서는 것이다. 위의 어른들이 던진 희망도 절망 속에서 길어낸 것 아니겠나. 그렇다. 우리는 절망의 늪에서 희망의 덩굴이 저절로 드리워지기 기다릴 수는 없다. 허우적거리면 더 빠져들 뿐이다. 감연히 절망에 맞서서 결연히 헤어나와야 한다. 한국은 절망의 담금질을 견디며 반만년을 이어온 강철 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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