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퍼 플래그로 보는 미국 농구 [유병철의 스포츠 렉시오]
  • 유병철 기자
  • 입력: 2025.04.09 05:16 / 수정: 2025.04.09 05:16
플래그, 광란의 3월 4강서 스톱
버드-존슨의 라이벌, 조던의 등장 등 미리 보는 NBA
플래그는 ‘1년 더’에도 불구, NBA 진출
듀크대학의 신입생으로 미국 농구잡지의 표지 모델로 등장한 쿠퍼 플래그. l 슬램
듀크대학의 신입생으로 미국 농구잡지의 표지 모델로 등장한 쿠퍼 플래그. l 슬램


[더팩트 l 유병철 전문기자]

# 마치 매드니스(March Madness). 우리말로 ‘광란의 3월’. 남의 나라, 그것도 프로무대가 아닌 대학농구를 가리키는 이 말은 이미 한국에서도 농구팬을 넘어 ‘스잘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스포츠용어가 됐습니다. 영어의 라임을 맞춰 스위트 식스틴(Sweet sixteen 16강), 엘리트 에이트(Elite eight 8강), 파이널 포(Final four 4강) 등의 용어도 있죠.

당연히 흥행규모도 엄청납니다. 2025년 기준 생산효과가 총 200억 달러(약 29조 원)에 이른다는 연구도 있고, TV광고료는 미프로농구(NBA) 플레이오프의 약 3배에 달하고, 베팅 규모는 NFL 슈퍼볼보다 2배가 넘습니다. 승리팀을 예측하는 브래킷(Bracket) 게임이 대중적인데, 브래킷에 학문을 의미하는 접미사 ‘-어러지(ology)’를 붙여 브래키톨로지(Bracketology), 즉 ‘브래킷 학(學)’이 만들어질 정도입니다.

# 광란의 3월은 NBA 패러다임 변화를 예고해 왔습니다. 시계추를 돌려 1979년 3월로 가보죠. 매직 존슨의 미시건주립대와 래리 버드의 인디애나주립대가 파이널에서 격돌했습니다. 당시 챔피언결정전도 녹화중계될 정도로 망해가던 NBA 사무국은 여기에 주목했습니다. 이 구도가 ‘원 히트 원더’가 아니라, 향후 NBA를 먹여살릴 ‘하늘이 내린 라이벌 관계’로 봤기 때문입니다.

이 예상은 존슨과 버드가 그해 각각 동서부를 대표하는 LA레이커스와 보스턴에 입단하면서 적중했습니다. 존슨은 1979년 드래프트 1순위, 버드는 앞서 1978년 보스턴이 드래프트에 나오지도 않은 버드를 1라운드 6순위로 입도선매해 동시입단이 가능했습니다. 둘은 1984년 버드의 투혼이 빛난 NBA 파이널 역전우승, 1985년 존슨의 설욕 등 영화 같은 스토리를 쏟아냈습니다. 존슨의 에이즈 감염 사실이 알려졌을 때 버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농구에 흥미를 잃었다"고 밝힐 정도로 둘의 라이벌 구도는 1980년대 농구역사를 수놓았습니다.

전설의 시작. 1979년 매직 존슨(왼쪽)과 래리 버드가 광란의 3월 파이널에서 맞붙었다. l NCAA 홈페이지
전설의 시작. 1979년 매직 존슨(왼쪽)과 래리 버드가 광란의 3월 파이널에서 맞붙었다. l NCAA 홈페이지

# 3년 뒤인 1982년 3월의 광란. ‘농구의 신’은 최고의 흥행카드인 라이벌 구도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를 내야겠다고 결심한 듯보였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대의 신입생 마이클 조던은 파이널까지 올라오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패트릭 유잉이 버티던 강호 조지타운을 상대로 종료 14초를 남기고 위닝샷을 터트렸습니다.

전설의 명장 딘 스미스는 마지막 작전타임 때 19세 조던의 강심장을 알아보고, 최종 슈팅을 지시했는데 이것이 주효했습니다. 농구황제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고, 이 슈팅은 조던의 첫 번째 ‘더 샷’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조던은 1984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로 시카고에 입단했고, 이후는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덧붙여 2008년 3월에는 무명의 스테판 커리가 신기의 3점슛을 앞세워 약체 데이비슨대학을 8강에 올려놓으며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커리에서 촉발된 ‘양궁농구’가 이후 NBA 판도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도 주지의 사실입니다.

마이클 조던의 첫 번째 더 샷은 1982년 광란의 3월 파이널 마지막 순간 터졌다. l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연감
마이클 조던의 첫 번째 '더 샷'은 1982년 광란의 3월 파이널 마지막 순간 터졌다. l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연감

# 지난달 19일(이하 현지시간) 개막한 2025 광란의 3월이 4월 7일 플로리다대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찐’ 하이라이트는 지난 5일 열린 파이널 포 중 하나인 휴스턴대와 듀크대의 경기였습니다. 일단 승부 자체가 ‘이걸 이렇게 질 수 있나?’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역대급 역전드라마였습니다. 톱독 듀크대는 후반 종료 8분을 앞두고 14점차까지 앞섰습니다. 이 순간 중계방송을 하던 ESPN은 듀크대의 승리확률을 98.5%라고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후 휴스턴대의 질식수비, 그리고 듀크대 선수들의 어이없는 실수 등이 겹치며 최종 70-67로 휴스턴대가 극적으로 승리했습니다.

듀크대의 충격적인 4강 역전패를 다룬 한 유투버의 영상 썸네일. l 유튜브 Explore Wonders
듀크대의 충격적인 4강 역전패를 다룬 한 유투버의 영상 썸네일. l 유튜브 Explore Wonders

# 핵심은 미국 농구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듀크대의 신입생 슈퍼스타 쿠퍼 플래그(2006년 12월생)입니다. 키 206cm, 윙스팬 226cm의 탄탄한 체구에 흔히들 말하는 BQ(농구 IQ)가 높습니다. 이전 백인 농구스타들이 패스 등 팀플레이와 정확한 슈팅을 내세웠다면 플래그는 여기에 흑인선수 못지않은 운동능력까지 갖췄습니다.

공격은 물론 수비에서도 강점을 보이죠.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를 연상시키는 잘 생긴 외모에 학업성적도 준수하고 인성도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래리 버드 이후 반세기 만에 나타난 백인 슈퍼스타’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올시즌 NBA 하위권팀들이 드래프트에서 플래그를 잡기 위해 고의로 패배하는 ‘탱킹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플래그 쌍둥이 형제를 내세운 한 농구캠프의 포스터. 오른쪽이 동생 쿠퍼.
플래그 쌍둥이 형제를 내세운 한 농구캠프의 포스터. 오른쪽이 동생 쿠퍼.

# 아직 18세인 플래그의 경이적인 행보는 긴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중고교와 대학신입생인 올해까지 모두 자신보다 2~3살 많은 형들을 상대로 역대급 성취를 이뤘다는 것은 기억해둘 만합니다. 르브론 제임스가 플래그의 경기를 보기 위해 고교농구장을 찾았고, 플래그는 고등학생이던 2022년 역대 최연소로 '올해의 미국 남자 농구 선수'에 선정됐습니다.

그리고 1살 어린 대학신입생 플래그는 NCAA에서 한층 더 '농구 괴물'로 진화해 올시즌 신인상, 올스타를 넘어 'NCA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됐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나이에 대학 최고의 선수가 된 것입니다.

# 사실 쿠퍼의 1년 빠른 행보는 NBA 규정을 최대한 활용한 것입니다. 한때 초고교급선수들의 NBA직행이 러시를 이뤘습니다. 물론 케빈 가넷처럼 성공한 선수도 있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큰 무대에서 뛰는 것이 기량발전은 물론 선수개인의 인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이에 NBA 사무국은 2005년부터 리그에 뛰기 위해서는 (1) 고교졸업 후 1년이 경과해야 한다 (2) 만 19세를 넘겨야 한다는 ‘원앤돈(One and Done)’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대부분 가을에 새 학년이 시작하는 미국에서 보통 만 19세가 되는 해에 대학루키가 되고, NBA 진출은 빨라도 만 20세가 되는 겁니다.

실제로 쿠퍼의 쌍둥이 형으로 역시 농구선수인 에이스는 현재 고3으로 오는 가을 대학생이 됩니다. NBA에서는 1년에 10% 정도 연봉인상이 이뤄지고, 신인은 4년 계약을 하는데 천문학적인 연봉이 예상되는 쿠퍼는 1년을 앞당김으로써 얻는 경제적 이득이 아주 큰 것이죠.

미국 국적 백인 슈퍼스타의 등장! 쿠퍼 플래그가 NBA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을 지 큰 기대가 쏠리고 있다. 사진은 고교시절 그가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 것을 알리는 포스터.
미국 국적 백인 슈퍼스타의 등장! 쿠퍼 플래그가 NBA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을 지 큰 기대가 쏠리고 있다. 사진은 고교시절 그가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 것을 알리는 포스터.

# 플래그는 오는 6월 NBA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픽이 예상됩니다. 물론 올시즌 내내 듀크대 팬들은 그가 코트에 등장하면 "1년 더(One moer year)"를 외쳤습니다. 한 살이 어리니 듀크대에서 한 해 더 뛰라는 요구지요. 또 이번 광란의 3월에서 쿠퍼가 우승하지 못하면, 우승을 위해 1년 더 대학리그에 남을 수도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주 낮아 보입니다. 이미 플래그는 대학 최고의 선수가 됐고,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플래그는 휴스턴대와의 4강전 종료 7초를 남기고 자유투 라인 근처에서 역전 점프슛을 던졌지만 실패했습니다. 조던과는 달리, 광란의 3월 ‘더 샷’을 만들지는 못했죠.

경기 후 울음을 터트리기도 한 그는 인터뷰에서 "모두 내 책임이다. 나에게는 클러치 능력이 없다"고 고개를 떨궜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최고조입니다. 실제로 플래그는 마지막 슛을 놓쳤을 뿐 이날 27점으로 양 팀 통틀어 최다득점을 올렸습니다.

또 올시즌 평균 18.9득점에 NCAA 사상 처음으로 675득점에 250리바운드, 150어시스트, 50스틸, 40블록슛을 넘어서는 진기록을 세웠습니다. 1977년 켄트 벤슨 이후 48년 만에 '백인 1순위 지명 선수'가 예상되는 쿠퍼 플래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3월의 광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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