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 태조 이성계 시기에 만들어 진 것은 마모가 심해 숙종 때 다시 제작했다./이주상 언론인 |
[더팩트 | 이주상 칼럼니스트] 무력으로 고려 475년 사직을 강탈한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가장 기뻐한 일은 무엇일까? 바로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운 '역성혁명'의 당위성을 상징적으로 강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수준을 가늠할 때 가장 중히 여기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바로 과학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뜻을 풀이하면 ‘하늘 형상(天象)을 차(次)와 분야(分野)에 따라 나열(列)한 것의(之) 그림(圖)’이라는 뜻으로 '차'는 1년을 12등분(월) 한 것, '분야'는 별자리(황도 12궁 등)의 영역을 나눈 것을 의미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석각은 이성계 때 만든 것이지만, 기원은 아주 오래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원본은 고구려 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에서 발견된 천문 지도 중 가장 오래 된 데다 정밀해 수많은 학자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그 귀중함에 국보로 지정됐고, 한국의 국보를 떠나 세계적인 유산이 됐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 초기부터 석각본, 목판본, 필사본 등으로 제작·보급된 한국의 전천천문도(全天天文圖)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태조 석각본으로 가로 122.8 cm, 세로 200.9 cm 크기의 돌에 새겨졌다. 태조 석각본은 국보 228호로 지정되었다. 숙종 때 태조 석각본을 복제한 석각본은 보물 837호로 지정돼 있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어진박물관에 보관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 '조선태조어진'. |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가 조선 초기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애를 쓸 때 평양의 한 촌부가 고구려 때의 천문도라며 이성계에게 탁본을 진상했다. 천문도를 새긴 비석은 원래 평양성에 있었으나 전란 중에 대동강에 빠트려 원본은 사라지고 탁본만 남아 이성계에게 전달한 것이다.
탁본에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관측할 수 있는 모든 별자리가 수록되어 있어 이성계는 ‘이는 하늘이 내린 계시이다’라며 역성혁명의 당위성으로 삼았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후 저항 세력에 큰 고초를 겪었다. 무력으로 고려 왕조를 뒤엎은 것은 백성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의 힘으로 건국됐다. 나라 이름이 바뀌는 역성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위성’과 ‘정당성’이었다.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천명사상’을 통해 통치자의 정당성을 하늘에서 찾았다. 이참에 나타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민심을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별이 700년 가까이 사라졌다가 이성계가 건국하면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천명사상은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면 하늘이 화답해 상서로운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하늘의 현상을 빼곡히 적어 놓은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왕의 통치를 위해서도 중요해서 민심을 달래는 데 가장 적절했다.
제작을 담당한 개국공신 권근은 "전하께서는 선왕의 양위로 권좌에 오르셨다. 그의 통치는 요와 순임금의 덕에 비교될 수 있는 덕으로 온 나라를 통하여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전하는 천문을 자신의 조사의 맨 앞에 놓으시어서 별의 자오선 통과 시간을 정정하시니, 마치 요와 순임금이 7행성을 관찰한 것과 같다. 내가 믿건대 이렇게 해서 천체를 관측하고 천문의기를 제작함으로써 전하는 요와 순임금의 마음을 알아내고 그래서 그들의 가장 귀중한 예를 본받으려 노력하신 것이다"라며 개국의 정당성을 천상열차분야지도를 통해 웅변했다.
마름모꼴의 '종대부' 별자리는 조선에서만 관측할 수 있어 의미가 크다. 중국과는 다른 독자성을 보여주고 있다./이주상 언론인 |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새겨진 별자리는 283개를 이루는데, 별자리 개수는 현대 천문학에서 정한 88개보다 많다.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 신화의 별자리는 48개다. 선조들의 천문학 지식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의미 있는 것은 관측 위치다. 바로 우리 영토 내에서 관측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때의 원본이 사라졌지만, 일본의 나라현에 있는 기토라 고분의 천문도가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의 평양 하늘을 그린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영방송인 NHK와 도카이 대학의 천문학팀이 첨단기술인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분석한 결과여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중국 천문도에서는 볼 수 없는 ‘종대부’라는 별자리가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수록되어 있어 독자성을 입증하고 있다.
사대주의 영향으로 24절기 등은 중국의 것을 따라 우리와 맞지 않은 점이 많다. 하지만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우리의 시점으로 하늘을 관측해, 정밀한 데이터를 얻은 천문도다. 과학은 국력의 척도이다. 자주적인 생각으로 수많은 이민족을 물리친 고구려 700년 역사의 저력을 천상열차분야지도를 통해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