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다저스의 '침묵', 스포츠는 사회적 이슈에서 중립일 수 있나 [황덕준의 크로스오버]
  • 황덕준 재미 언론인
  • 입력: 2025.06.21 00:00 / 수정: 2025.06.21 00:00
미국 여자프로축구 리그(NWSL) 앤젤시티FC 선수들이 노스캐롤라이나 커리지FC와 경기에 앞서 이민자 도시 축구단(Immigrant City Football Club)이라는 문구의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트럼프 정부의 이민자 정책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앤젤시티FC
미국 여자프로축구 리그(NWSL) 앤젤시티FC 선수들이 노스캐롤라이나 커리지FC와 경기에 앞서 '이민자 도시 축구단(Immigrant City Football Club)'이라는 문구의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트럼프 정부의 이민자 정책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앤젤시티FC

[더팩트 | LA=황덕준 재미 언론인] 로스앤젤레스(LA)에서 무차별한 이민자 단속에 항의하는 시위가 한창이던 6월 14일. 주방위군에 이어 해병대까지 투입된 다운타운 시위현장에서 3km 남짓 거리의 BMO스타디움에서는 미국 여자프로축구 리그(NWSL) 앤젤시티FC와 노스캐롤라이나 커리지FC의 경기가 열렸다.

엔젤시티 구단은 경기에 앞서 1만여 관중에게 검은 색 티셔츠를 나눠줬다. '로스앤젤레스는 모두를 위한 도시(Los Angeles is for everyone)'라는 문구가 영어와 스페인어로 6줄씩 박혀 있었다. 한국계 케이시 유진 페어를 포함한 엔젤시티 선수들과 독일 뮌헨에서 부임한 지 얼마 안된 알렉스 스트라우스 감독은 앞가슴에 '이민자 도시 축구단(Immigrant City Football Club)'이라고 적힌 검은 티셔츠를 입었다. 경기장 밖 시위상황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도발적인 모습이었다.

LA를 본거지로 삼고 있는 11개 프로스포츠 프랜차이즈팀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이민자 단속 정책에 반대하는 미국 사회 전역의 저항 분위기에 목소리를 내기는 엔젤시티FC가 처음이다. 같은 시각 8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저스타디움에서는 LA다저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경기가 있었다.

플레이볼에 앞서 미국 국가를 부르기 위해 그라운드에 선 여성은 인기 유튜버인 가수 네짜(Nezza).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으로 본명이 바네사 에르난데스인 네짜는 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The Star-Spangled Banner)'를 스페인어로 불렀다. 1945년 미 국무부가 승인한 스페인어 버전이었다.

네짜는 "내 마음이 이민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네짜는 다저스타디움에서 노래한 동영상을 틱톡에 올렸다. 다저스 구단 직원이 '영어로 된 국가만 불러달라'고 했다는 뒷얘기를 함께 전했다. 그러자 CNN이 인터뷰했다. 네짜는 "국가를 부른 직후 30초 만에 다저스 관계자로부터 다시는 전화도, 이메일도 보내지 마라. 다른 관객들이 더 이상 환영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화를 받았다. 마치 출입금지령 같았다"라고 털어놓았다.

금세 전국적인 논란이 됐다. 다저스 구단은 부랴부랴 "우리는 네짜를 언제든지 환영할 것"이라는 성명을 내고 논란이 더 확산되지 않게 하려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미국 사회가 이민자 과잉단속에 반발하는 데서 나아가 트럼프 정부의 온갖 정책을 '왕 놀이'로 규정하고 '왕은 없다(No King)'를 시위의 구호로 내세우는 와중에 나타난 LA의 두 스포츠구단이 보여준 자세는 참으로 상징성이 크다.

엔젤시티FC는 LA 이민자 커뮤니티와 연대의식이 굳건하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구단의 공동 창립자 중 한명인 멕시코계 이민 3세 가수 베키 지(Becky G)는 "이 도시는 이민자들로 만들어졌다. 축구는 이민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라고 그날 BMO스타디움이 쩌렁쩌랑하게 외쳤다. '검은 티셔츠'는 구단의 마케팅이나 이벤트가 아니라 명백한 정치사회적 메시지였던 것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는 연방정부의 이민자 단속과 이에 따른 시위가 도시 전역을 휩쓸었지만 입장을 밝히지 않겠다는 한 문장으로 대응해 논란이 되고 있다./LA=황덕준 언론인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는 연방정부의 이민자 단속과 이에 따른 시위가 도시 전역을 휩쓸었지만 "입장을 밝히지 않겠다"는 한 문장으로 대응해 논란이 되고 있다./LA=황덕준 언론인

중립 대신 책임을 선택한 엔젤시티FC의 영향을 받은 듯 남자프로축구리그 메이저리그 사커(MLS)의 LA FC도 그 다음날 트럼프 정부의 이민정책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같은 시기에 LA 다저스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연방정부의 단속과 이에 따른 시위가 도시 전역을 휩쓸었지만, 구단은 "입장을 밝히지 않겠다"는 한 문장으로 대응했다.

팀의 오랜 팬들과 라티노 커뮤니티 일각에서는 이 같은 태도에 '배신감을 느낀다'고 분노했다. 유력매체 LA타임스는 "다저스 팬의 40%는 중남미계 히스패닉'이라며 "구단의 침묵은 비겁하다"고 비판했다. 한 시민은 "다저스타디움을 세우는 과정에서 멕시코계 커뮤니티를 몰아낸 역사가 있다"며 "지금의 침묵은 과거의 반복"이라고 지적했다. 거기에 스페인어 국가를 부른 가수를 배척하려한 시도가 드러나 다저스의 침묵은 그 자체로 '무책임한 팀'이라는 메시지가 돼버렸다.

스포츠나 엔터테인먼트를 포함한 문화예술계가 정치적 이슈에 대해 대체로 중립적인 위치에 서려고 하는 경향이 있음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국제축구연맹(FIFA) 등 주요 스포츠 기구는 정치적 중립성을 규정에 두고 있다. 문화예술계도 예술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 중립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보편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경기장은 늘 사회의 축소판이었고, 선수와 팬은 현실의 일부다. 이민, 인종, 젠더, 빈부격차-이 모든 사회적 개념은 공과 네트, 잔디 위에서도 심심찮게 논쟁거리로 불거져 왔다. 엔젤시티FC는 구단의 브랜드와 메시지를 일치시켰다. 다저스는 무슨 이유에선지 '중립'을 유지했지만, 그 선택이 오히려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기반으로 삼는 커뮤니티를 방관하는 무책임한 태도로 읽히고 있다.

그리고 가수 네짜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양심을 선택한 인물로 돋보였다.스포츠는 사회적 영향력이 큰 플랫폼이다. 팀과 선수는 팬의 사랑을 통해 성장하고, 그만큼 책임도 따른다.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는 선택조차도 정치적 판단일 뿐이다. 단지 경기를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팬이 된다. LA의 두 스포츠 구단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선택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선택은, 팬이 되는 팀을 고르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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