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한일전 명승부 '도쿄 대첩'의 영웅 이민성 용인시청 수석코치 <사진 - 문병희 기자>

[유성현 기자] 1997년 9월 28일,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은 온통 울트라 닛폰의 푸른색 물결로 가득했다. 4년 전 '도하의 비극'을 경험하며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 티켓을 한국에 넘겨줬던 일본.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양 팀은 또다시 운명적인 맞대결이 성사됐다. 이번만큼은 안방에서 한국을 꺾고 사상 첫 월드컵 본선행의 디딤돌을 놓겠다는 일본의 승리 열망은 강했다.

경기는 최고의 라이벌간의 혈투답게 초반부터 팽팽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후반 중반까지 양 팀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이어가며 득점 없이 살얼음판 승부를 이어갔다. 그러나 후반 22분, 야마구치의 재치 있는 로빙 슈팅이 김병지 골키퍼의 키를 넘겨 골 망을 흔들면서 한국은 패배의 그늘이 짙게 드리웠다.

하지만 '각본 없는 드라마'는 그 때부터 시작이었다. 경기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은 후반 37분, 최용수의 헤딩 패스를 받은 서정원이 극적인 동점골을 넣어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리고 3분 뒤, 수비수 이민성은 페널티 박스 정면 30m 지점에서 통렬한 왼발 중거리 슈팅으로 역전골을 쏘아 올렸다. 일본의 심장부 도쿄에서 일궈낸 짜릿한 역전승. 이 날은 '도쿄 대첩'이라 명명돼 한국 축구 역사 최고의 명승부 중 한 경기로 기억돼 왔다.

그러나 14년이 지난 한국 축구는 지난달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친선 전에서 0-3이라는 참혹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37년 만의 3골 차 참패에 축구 팬들의 충격은 컸다. 과거 일본 원정에서 짜릿한 역전승을 일궈냈던 '도쿄 대첩'에 대한 향수는 더욱 짙게 남았다. <더팩트>은 '그때 그 순간'의 첫 주인공으로 '도쿄 대첩의 영웅' 이민성(38) 용인시청 수석코치를 만났다. 지난 2일 명지대 용인캠퍼스 인근 카페에서 만난 그는 현역을 떠나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14년 전 환희의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지금보다 더 했던 한일전 열기 "죽기 살기로 뛰었다"

▲ 어느덧 14년이 지난 '도쿄 대첩'의 환희를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민성 수석코치. 그는 과거 현역시절의 탄탄했던 체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 최근 한일전 완패로 과거 '도쿄대첩'의 역전승은 더욱 빛나는데. 당시 분위기는?

그때의 한일전은 지금보다 더 관심이 집중됐죠. 세계 최강팀과 맞대결보다도 한일전이 그야말로 최고 흥행 카드였으니까요. 게다가 월드컵 본선행을 좌우하는 경기이니만큼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죠. 양국은 정서적으로도 표현하기 힘든 경쟁심이 있잖아요. 당시 제가 24살의 어린 나이여서 그런지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심했어요. 경기장 분위기에 있어서도 도쿄 국립경기장이 온통 파란 물결이었죠. 붉은 악마는 경기장 구석에 있었는데 많아야 천 명 정도였어요. 압도적인 응원까지 더해지니까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죠.(웃음)

- 큰 위압감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플레이가 인상적이었어요.

축구를 하면서 그런 기분을 두 번 느꼈어요. 그 때 한일전이랑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전이죠. 당시 위압감이란 말로 설명하기 힘들만큼 대단했어요. 그래도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안했던 것 같아요.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죠. 선수들끼리도 지면 죽는다는 식으로 임했으니까요. 선수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한일전 알지?" 준비 잘해서 이기고 오자"는 말만 되풀이했죠. 그만큼 비장함으로 가득 찼어요.

- 후반 중반 야마구치의 선제골로 패색이 짙었는데.

너무 어처구니없이 실점해서 속으로 '큰일 났다'고 생각했죠. 동점골이 터질 때까지 경기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죽기 살기로 뛸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웃음) 실점은 했어도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어요. 경기 전에는 원정이다 보니까 비겨서라도 승점 1점을 따낸다면 우리에게 유리할 거라 생각했죠. 근데 한일전은 비겨도 찝찝한 감정이 남기 때문에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어요.

◆ '일본 침몰' 그때 그 순간 "생각한 대로 꿈은 이뤄진다"

▲ 일본의 심장부 도쿄에서 통렬한 중거리 슈팅으로 역전승을 이끈 이민성. 그의 짜릿한 역전골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 경기 막판 서정원의 동점골이 터졌죠. 승리 예감 들었나요?

그동안 한일전 치르면서 느꼈던 건데, 일본 선수들은 우리가 먼저 득점하거나 쫓아가면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 때도 그랬죠. 흔히들 패닉 상태라 하잖아요.(웃음) 일본 선수들이 당황해 하는 모습을 직접 느끼면서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와 비교해서 지금 일본 축구가 많이 바뀐 점을 꼽자면 바로 그런 정신력이 좋아진 것 같아요.

- 한일전 역대 최고의 골로 꼽히는 역전골을 직접 터뜨렸는데.

예전부터 항상 생각해왔던 시나리오가 있었어요. 농구로 따지면 버저비터 같은 골이랄까요. 내심 '그런 걸 넣으면 기분이 어떨까? 끝내주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런 생각들이 그날 진짜 맞아 떨어진 것 같아요. 흔히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말하잖아요. 딱 그 순간에 정확하게 해당되는 말이었어요.

- 공에 발이 맞는 순간 어느 정도 득점을 예상할 수 있다던데, 당시 직감했나요?

슈팅이 잘 맞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근데 공이 쭉 뻗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서 안 들어갈 줄 알았죠. 도쿄국립경기장이 오래된 경기장이라 페인트칠이 덧대져서 상당히 딱딱하거든요. 라인에 맞고 불규칙 바운드가 되는 순간에서야 '들어갔구나' 싶었어요. 운이 좋았죠.(웃음)

- 그 골이 A매치 데뷔골이었어요. 세리머니도 인상적이었는데.

A매치 데뷔골인만큼 어리둥절했죠.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골이 들어간 건지도 확실히 몰랐어요. 골 넣고 나서는 그냥 (홍)명보 형에게 막 뛰어간 것 같아요. 사실 누구한테 뛰어 가려고자 한 의도는 아니었는데 달리다 보니 명보 형이 손 벌리고 계셔서 안겼어요(웃음). 골 넣고 나서는 더 생생해요. 경기 종료를 5분 정도 남기고 넣었거든요. 남은 5분의 시간은 정말 안가더라고요. 그 짧은 시간이 90분보다도 더 길었던 것 같아요.(웃음)

◆ '한일전 영웅'으로 뜨다…"도쿄대첩은 환희와 좌절의 순간"

▲ 굴곡진 현역 시절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긴 이민성 수석코치. 그는 도쿄대첩을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꼽으면서도 훗날 좌절을 맛보에 한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표현했다.

- 워낙 극적인 경기였기에 '각본 없는 드라마', '후지산이 무너진다' 등 유행어도 탄생했죠.

경기를 마친 뒤에는 일부러 득점 장면을 안 봤어요. 엄청 쑥스럽더라고요. 경기 끝나고 어디를 가더라도 TV를 통해 자주 나왔고요. 지금도 한일전 하면 나오잖아요. 근데 저는 아직도 창피해서 도저히 못 보겠더라고요. 이제는 그만 나왔으면 좋겠어요.(웃음)

- 한일전 이후 단번에 집중된 유명세, 어느 정도였나요?

정말 큰 사랑 받았죠.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돈을 안 가지고 다녀도 될 정도였어요(웃음). 미용실에 가도 공짜, 밥 먹으러 갔다가 돈을 내려고 하면 이미 누군가가 계산하고 가셨더라고요. 택시를 타더라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기사 분께서 그냥 내리라고 하신다거나…. 생각해보면 잊지 못할 행복한 경험이었죠.

- 이민성에게 도쿄대첩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환희와 좌절의 순간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딱 그 경기만 보면 더할 나위 없는 환희겠지만, 이후에는 그와 관련된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았거든요. 그때 한일전, 그리고 역전골이 제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순간이면서도 제 축구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됐죠. <①편 끝>…②편(9월 15일)에서는 도쿄대첩 이후 이민성의 좌절의 순간, 현재 대표팀에 대한 조언, 지도자로 제 2의 인생 설계 등이 이어집니다.

<글 = 유성현 기자, 사진 = 문병희 기자>
더팩트 스포츠기획취재팀 기자 yshalex@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