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⑤] '골 넣는 골키퍼' 김병지와 '거미손' 이운재
입력: 2013.05.27 07:40 / 수정: 2013.06.04 15:44
한국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라이벌 이운재(왼쪽)와 김병지. /출처=스포츠서울 DB, 김병지 트위터
한국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라이벌' 이운재(왼쪽)와 김병지. /출처=스포츠서울 DB, 김병지 트위터

[ 심재희 기자] 축구에서 골키퍼는 '최후의 보루'다. 골문 앞에서 상대의 공격을 온 몸을 던져서 막아내야 한다. 한국 축구가 세계 수준과 격차가 많이 났을 때부터 혼신의 힘을 다해 대표팀 골문을 지켜냈던 골키퍼들이 이번 라이벌 열전의 초대 손님이다. '살아있는 전설' 김병지와 이운재가 이번 스토리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수준의 기량을 자랑한 '명수문장' 김병지와 이운재의 치열했던 경쟁을 재조명한다.

# '골 넣는 골키퍼' 김병지

김병지는 1970년 4월 8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밀양초등학교 4학년 때 정식으로 축구의 길에 들어선 그는 밀양중학교를 거쳐 마산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골문을 지키던 김병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선수생활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놀라운 순발력과 판단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키가 작아 경쟁에서 밀렸던 것. 당시 그의 키는 163cm로 골키퍼 치고는 매우 작았다. 결국 김병지는 잠시 축구의 길을 떠나 용접기능사 자격증을 따는 등 전공에 집중했다. 축구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아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 김병지는 2년 동안 20cm가 자라면서 여느 골키퍼 못지않은 신장을 갖추게 됐다. 그리고 부산 소년의 집(현재 알로이시오전자기계고등학교)으로 전학해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남다른 재능에 구슬땀을 더해 안정적인 기량을 갖춘 그는 상무를 거쳐 1992년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하면서 오랫동안 그리던 프로선수의 꿈을 이뤘다.

K-리그 무대에 입단한 김병지는 최고의 골키퍼로 성장했다. 신인답지 않은 노련한 모습으로 안정감 있게 울산의 골문을 사수했고,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로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프로 데뷔 이후 8년 동안 울산의 주전 수문장으로서 177경기를 소화했고, 포항과 서울, 경남을 거쳐 현재 전남 드래곤즈의 골문을 지키고 있다. 1996년 울산과 함께 K-리그 우승의 영광을 맛봤고, 베스트11 4차례, 특별상 3차례 등 수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1995년부터 2007년까지 12년 연속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면서 별 중의 별로 인정받았다. K-리그를 대표하는 골키퍼로 올라섰으니 대표팀 발탁은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였다. 김병지는 1995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고, 이후 62번의 A매치를 치르면서 '국제용'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김병지는 프로 통산 600경기 출전의 금자탑을 쌓으며 K-리그의 살아있는 전설로 거듭나고 있다./ 출처=전남 드래곤즈 제공
김병지는 프로 통산 600경기 출전의 금자탑을 쌓으며 'K-리그의 살아있는 전설'로 거듭나고 있다./ 출처=전남 드래곤즈 제공

김병지는 여러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다. 공격수보다 더 빠른 스피드를 지니고 있어 '번개'라고 불렸다. 실제로 김병지는 100미터를 11초7에 주파해 윙어들 못지않은 바람 같은 스피드를 자랑했다. 개성 넘치는 스타일로 '꽁지머리'로 불리기도 했던 그는 연예인 뺨치는 외모관리로 팬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또한 김병지는 '골 넣는 골키퍼'(통산 2골)로 신문 1면을 장식했다. 특히, 울산 소속이던 1998년 포항 스틸러스와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나온 골은 아직도 축구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1-1로 맞서던 후반 추가시간에 공격에 가담해 헤딩골을 작렬했다. 놀라운 위치선정과 정확한 헤딩으로 포항의 골네트를 시원하게 갈랐다. 골키퍼로서의 능력만큼 대단한 '공격수 본능'을 느끼게 한 장면이었다.

# '거미손' 이운재

이운재는 1973년 4월 26일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출생했다. 청주 청남초등학교 시절부터 운동에 소질을 보였던 그가 가장 먼저 잡은 것은 축구공이 아닌 던지기 공이었다. 공던지기 육상선수로 활약하다가 5학년 때 축구로 전향했다. 공격수 포지션을 맡은 소년 이운재는 대성중학교를 거쳐 청주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골키퍼로 변신했다. 그리고 경희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더욱 안정감이 넘치는 골키퍼로 거듭났다. 대학 시절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면서 이름을 날렸고, 올림픽대표팀의 부름을 받으면서 국제대회 경험을 쌓았다. 특히 페널티킥 방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얻으며 차세대 국가대표로서 주목받았다.

이운재는 1996년 신생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입단하면서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수원의 창단 멤버로서 14년 동안 활약했다. 그는 수원 전성기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 1998년, 1999년, 2004년, 2008년 수원의 4차례 K-리그 우승에 큰 공을 세웠다. FA컵 우승 3회(2002년, 2009년, 2010년), 아디다스컵 우승 1회(1995년), 대한화재컵 우승 1회(1999년), 삼성 하우젠컵 우승 2회(2005년, 2008년), 대한민국 슈퍼컵 우승 2회(1999년, 2005년),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우승 1회(2002년), 아시아 슈퍼컵 우승 1회(2002년), A3 챔피언스컵 우승 1회(2005년), 팬 퍼시픽 챔피언십 우승 1회(2009년)의 우승 기록을 남겼다. 이 기간에 K-리그 베스트11에 4차례 선정되면서 최고의 골키퍼로 떠올랐고, 2008년에는 골키퍼 사상 처음으로 K-리그 MVP를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2011년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해 철벽수비를 자랑한 그는 2012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운재는 K-리그 사상 최초로 골키퍼 MVP의 영광을 안았다. /출처=스포츠서울 DB
이운재는 K-리그 사상 최초로 '골키퍼 MVP'의 영광을 안았다. /출처=스포츠서울 DB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이운재는 올림픽대표팀에서 활약했다. 총 16경기를 뛰면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국가대표로는 1993년 데뷔해 2010년까지 17년 동안 132경기를 소화했다. 프로팀과 대표팀에서 고루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그는 '거미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상대의 슈팅이 그의 손에 어김없이 걸려들었기에 붙여진 영광의 별명이다. 안정적인 방어력과 정확한 판단력, 그리고 동료 수비수들을 조율하는 능력까지 고루 갖추면서 '골키퍼의 교본'으로 거듭난 이운재다. 또한 그는 '돌부처'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냉정한 승부사답게 경기 도중 진지한 표정을 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속팀에서나 대표팀에서나 이운재는 언제나 믿음직한 수문장이었다.

# 월드컵과 4강신화

김병지와 이운재는 월드컵을 통해서 스타덤에 올랐다. 먼저 월드컵에 데뷔한 쪽은 이운재였다. 이운재는 만 21살의 어린 나이에 1994미국월드컵 대표팀에 뽑혔다. 당시 김호 감독이 이운재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백업 골키퍼로 월드컵에 데려간 것이었다. 경험을 쌓는 대회로 생각했던 미국월드컵에서 이운재는 뜻밖의 기회를 얻게 됐다. 독일과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주전골키퍼 최인영이 난조를 보였고, 후반부터 이운재가 골문을 지켰다. 이운재는 독일의 간판스타 로타르 마테우스의 날카로운 중거리 슈팅을 선방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이면서 월드컵 데뷔전을 무실점으로 장식했다.

[영상] '골 넣는 골키퍼' 김병지, 추가시간 헤딩골 '작렬!'(http://www.youtube.com/watch?v=Mzb4UjXUAP8)


김병지는 1998프랑스월드컵에서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다. K-리그에서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국내 최고의 골키퍼가 된 그는 태극마크를 달고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 서게 됐다. 1998프랑스월드컵에서 한국은 초반 두 경기에서 참패를 당하면서 예선탈락이 확정됐다. 멕시코와 첫 경기에서 1-3으로 역전패했고, 네덜란드와 2차전에서는 0-5로 대패했다.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면서 분위기는 최악으로 흘렀다. 하지만 대표팀의 부진 속에서도 김병지의 선방만은 홀로 빛났다. 김병지는 상대의 강력한 슈팅을 육탄방어로 막아내면서 한국 골문을 사수했다. 2경기에서 8실점을 내줬지만, 세이브 횟수에서는 전체 선두를 달릴 정도로 고군분투 했다. 대회가 끝난 후,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여러 팀들이 구애의 손짓을 보낼 정도로 김병지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다.

[영상] 이운재 현역 시절 '선방 모음'(http://www.youtube.com/watch?v=9rJjQpdJj84)


2002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김병지와 이운재는 나란히 대표팀에 승선했다. 둘은 대회 직전까지 피 말리는 주전경쟁을 펼쳤고, 결국 이운재가 거스 히딩크 감독의 최종선택을 받으면서 골문을 지키게 됐다. 김병지와 맞대결을 이겨낸 이운재는 한국 골문을 걸어 잠그면서 4강신화의 주역이 됐다. 특히, 스페인과 8강전 승부차기에서 호아킨 산체스의 슛을 막아내면서 4강 진출의 일등공신이 됐다. 독일의 벽에 가로막혀 우승의 꿈은 접게 됐지만, 대회 내내 안정된 방어벽을 선보인 이운재에게 찬사가 쏟아졌다. 한데, 히딩크 감독은 대회가 끝난 뒤 "김병지에게 가장 감사하다"라는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눈에 보이는 주전 골키퍼는 이운재였지만, 김병지가 고참으로서 후배들을 잘 이끌어주면서 4강신화에 큰 힘을 보탰다 설명이었다. 이운재가 골문 앞에서 4강신화를 만들어냈다면, 김병지는 골문 밖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줬던 것이다.

# 살아있는 '롤 모델'

흔히들 골키퍼를 '고독한 포지션'이라고 한다. 잘 하면 본전이고, 못 하면 엄청난 비판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김병지와 이운재 역시 마찬가지 길을 걸었다. 1990년대 한국축구가 내리막을 걸었을 때도, 2002한일월드컵에서 4강신화를 썼을 때도 그들은 변함없이 골문 앞을 든든히 지키고 있었다. 쉽지 않은 가시밭길을 걸으면서도 자만하지 않고 노력에 노력을 더했기에 그들은 세계적인 수준에 근접할 수 있었다.

과거 프로구단의 한 주전 골키퍼를 인터뷰 한 적이 있다. 그에게 롤 모델로 삼는 선배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김병지 선배님과 이운재 선배님입니다"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너무 상투적인 대답인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두 선배님을 합쳐 놓은 골키퍼가 되는 것이 저의 가장 큰 목표입니다. 김병지 선배님의 순발력과 스타성, 이운재 선배님의 안정감과 페널티킥 방어능력을 합친다면 세계 최고의 골키퍼라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닙니다. 두 선배님과 함께 경기를 치른다는 자체가 저에게는 큰 영광입니다"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김병지와 이운재가 '살아있는 롤 모델'임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후배의 진심 어린 찬사였다.

김병지(위)는 여전히 현역 선수로 준수한 활약을 펼치고 있고, 이운재는 은퇴 후 제2의 축구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출처=스포츠서울 DB
김병지(위)는 여전히 현역 선수로 준수한 활약을 펼치고 있고, 이운재는 은퇴 후 '제2의 축구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출처=스포츠서울 DB

우리나이로 어느덧 김병지가 44살, 이운재가 41살이다. 김병지는 프로무대에서 600경기 출전의 금자탑을 쌓으며 여전히 선수로 활약하고 있고, 이운재는 은퇴 이후 '제2의 축구인생'을 위한 준비에 한창이다. 1990년대를 넘어 2000년대까지 K-리그 무대와 대표팀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였던 김병지와 이운재 모두 후배들의 '살아있는 전설'로서 힘찬 전진을 펼치고 있다. 그들의 라이벌 열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kkamanom@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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