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인터뷰] '정치 9단' 박지원 "낙선 후 방송 출연, 다 이유 있다"<하>
입력: 2020.06.04 05:00 / 수정: 2020.06.04 05:00
박지원 전 민생당 의원은 국회를 떠났지만, 자신은 성공한 정치인으로 자평했다. 특히 그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영원히 기억되기를 희망했다. 더팩트와 인터뷰 후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는 박 전 의원. /여의도=남용희 기자
박지원 전 민생당 의원은 국회를 떠났지만, 자신은 성공한 정치인으로 자평했다. 특히 그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영원히 기억되기를 희망했다. 더팩트와 인터뷰 후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는 박 전 의원. /여의도=남용희 기자

☞<상>편에 이어

"아내 임종 전에도 이발, 유언 지키려 2주마다 머리 자른다"

[더팩트ㅣ여의도=이철영 기자]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국회의원 4선 등 이 나이까지 했으면 성공한 정치인이 아닐까 스스로 생각한다."

박지원(77) 전 민생당 의원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국민 대부분은 박 전 의원을 알고 있다. 그의 말처럼 국회의원으로 또 고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기억한다. 이런 이력으로 박 전 의원은 흔히 '정치 9단'으로 통한다. 정치인으로 산 만큼 굴곡도 많았다.

그는 "이번 총선 낙선은 섭섭한 게 사실이다. 한편으론 부덕의 소치이고 시대의 바람을 이겨낼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더팩트>는 1일 오전 국회가 아닌 여의도 사무실에서 박 전 의원을 만났다. 그는 약 2시간 동안의 인터뷰에서 본인의 정치 여정과 앞으로의 역할, 그리고 아내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박 전 의원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했던 당시를 이야기하며 미소 짓고 있다. /남용희 기자
박 전 의원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했던 당시를 이야기하며 미소 짓고 있다. /남용희 기자

◆DJ 비서실장, 가장 큰 영광

박 전 의원은 여러 가지를 정리 중이다. 그래서 현역 시절보다 더 바쁜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다. 수십 년 정치 생활로 신세진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지난 총선에서 낙선했지만, 후회는 없어 보였다.

그는 "제가 대(大)통령은 못 했지만 대(代 대신할 대)통령은 했다. 대북송금 특검으로 인한 5년의 정치 공백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이 정도면 성공한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그의 정계 입문에는 DJ가 있다. 1980년대 미국에서 사업하던 그는 DJ를 따라 한국으로 왔고, 정치를 시작했다. DJ의 마지막도 곁에서 지켰다. 정치인으로서의 영광도 DJ와 함께였을 때다. 박 전 의원과 DJ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박지원 앞에 어떤 말이 붇는 게 좋으냐'는 질문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DJ의 비서실장이다. 저는 DJ의 비서실장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어 "분단 반세기 만에 특사로 북한에 갔고,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을 성공시켰다. 또, 많은 진전이 있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며 대북관계가 잃어버린 10년이 됐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재개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09년 8월 9일 김대중 대통령 서거 당시 북한 조문단 관련 내용을 기자들에게 브리핑하던 박 전 의원. /더팩트 DB
지난 2009년 8월 9일 김대중 대통령 서거 당시 북한 조문단 관련 내용을 기자들에게 브리핑하던 박 전 의원. /더팩트 DB

그는 "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판문점 정상회담과 평양 정상회담 현장에 특별 수행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김 위원장은 물론 북한 고위인사들이 저에게 '장관 선생이 이룩한 6·15의 결과다'고 말해 정말 뿌듯했다"고 말하며 감격에 젖었다.

우리 정치사는 늘 다사다난한 질곡의 역사였다. 박 전 의원은 "저 역시 늘 그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저 역시 다사다난했고, 질곡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박 전 의원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꼽았다. 그는 "당시 12월 2일 상정하느냐 9일 상정하느냐를 놓고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제가 우겨서 9일 상정하면서 탄핵을 의결할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DJ를 만나지 않았다면 정치 9단 박지원은 존재했을까. 정치와는 인연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대답은 달랐다. "전라남도 진도 섬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부터 국회의원이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집안 어른들의 출마와 선거를 늘 보고 자랐다. 멋있게 보였다. 그래서 책상 앞에 '국회의원'이라고 써놓고 보았다"며 "YS(고 김영삼 대통령)처럼 꿈이 '대통령'이라 썼으면 대통령이 됐을 텐데, 국회의원이라고 써서 국회의원이 됐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한다는 말이 또 "역시 보이스 비 앰비셔스(Boys be ambitious)"라고 농담을 던졌다.

박지원 전 민생당 의원은 2주마다 머리를 자른다. 그의 아내는 생전 마지막으로 짧은 머리와 2주마다 이발을 당부했고, 박 전 의원은 이를 지키고 있다. 박 전 의원이 인터뷰에서 고인이 된 아내 이선자 씨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남용희 기자
박지원 전 민생당 의원은 2주마다 머리를 자른다. 그의 아내는 생전 마지막으로 "짧은 머리와 2주마다 이발"을 당부했고, 박 전 의원은 이를 지키고 있다. 박 전 의원이 인터뷰에서 고인이 된 아내 이선자 씨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남용희 기자

◆제가 2주마다 머리를 자릅니다!

박 전 의원 정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을 또 꼽자면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이선자 씨다. 그의 아내는 뇌종양으로 투병하다 지난 2018년 10월 15일 별세했다.

그는 아내를 보내며 본인 SNS에 "미안하고 잘못했고 사랑했다. 아내도 저를 무척 사랑했다. 여보 잘 가, 미안했고 잘못했고 사랑해"라는 글을 적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약 2년이 지났지만, 짧은 머리를 만지며 꺼낸 그의 말에서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박 전 의원은 "아내가 살아있으면 출마하지 않았겠지만, 정치는 지금처럼 했을 것"이라며 "아내를 너무 고생시켰다. 아내가 떠나기 3~4년 전 둘이 휴가를 갔었다. 화엄사에서 아내와 이야기하면서 '그만하자'고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아내와의 대화에서 출마 대신 미국에 있는 두 딸과 시간을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 재밌게 살자고 했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쉬면서 여행하며 살자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이후 투병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지난 2018년 10월 17일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이선자 씨의 발인식에서 고인을 배웅하는 남편 박 전 의원의 모습. /뉴시스
지난 2018년 10월 17일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이선자 씨의 발인식에서 고인을 배웅하는 남편 박 전 의원의 모습. /뉴시스

그는 "제가 말썽은 있었지만, 아내는 말썽이 없었다"면서 "아무도 안 믿는데 아내가 시내버스에서 넘어져서 진단을 받았는데 뇌종양이었다. 비서실장 당시 공관에 일을 도와주는 분들도 있었지만, 아내는 차도 안 타고 버스, 지하철을 이용해 여의도에 있는 집에 혼자 있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며 아내는 생전 누구보다 소박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 이야기를 하며 무척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아내와의 추억을 다시 꺼냈다. "내가 잘 못 했으니까"를 반성하듯 반복했다.

투병 중 기력이 없는 가운데도 그의 아내는 박 전 의원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정치 못 하면 죽을 사람이야. 그러니까 목포에 가서 열심히 해라. 대신 앞으로 삶은 두 딸을 위해 살았으면 좋겠다."

이 말을 들은 박 전 의원은 아내의 손을 잡고 "여보, 우리 재밌게 살기로 했잖아, 왜 그런 소리를 해"라며 나무랐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며 당시를 떠올리던 박 전 의원은 "사실상 유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전 의원의 아내는 그의 짧은 머리를 좋아했다. 지금도 그의 머리가 짧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아내와 7년간 연애할 때 박 전 의원은 이등병처럼 짧은 머리였다.

그는 "아내가 사망하기 열흘 전쯤 눈을 뜨고 밝은 미소로 '당신은 머리 짧게 자르고 2주에 한 번씩 잘라'라는 게 마지막 말이었다"면서 "아내 임종하던 날도 주치의에게 두 시간만 연명해달라고 부탁했다. 곧바로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아내에게 갔다. 짧게 자른 머리를 아내는 보지 못했지만"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이어 "지금도 아내의 마지막 말처럼 2주에 한 번씩 머리를 자른다. 아내의 유언을 지키려고 한다"며 수첩에 적힌 이발 날짜를 보여줬다.

박 전 의원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열심히 방송하면서 문 대통령 성공을 돕고, 따끔한 지적도 하겠다. 또, 대북정책과 관련한 역할을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으로 본다며 웃었다. /남용희 기자
박 전 의원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열심히 방송하면서 문 대통령 성공을 돕고, 따끔한 지적도 하겠다. 또, 대북정책과 관련한 역할을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으로 본다"며 웃었다. /남용희 기자

◆문재인 대통령의 성공과 정권 재창출 도울 것

고인이 된 그의 아내의 말처럼 정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인 건 분명해 보인다. 낙선 후에도 어떤 정치인보다 방송에 많이 출연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국회를 떠났지만, 역할은 있다는 게 박 전 의원의 생각이다.

그동안 정치사에 많은 역할을 했던 그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했다. 더 무엇을 이루려는 것일까.

박 전 의원은 "문 대통령의 성공을 통해 진보 정권이 재창출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할 것"이라며 "그래야 DJ의 이념, 대북정책도 꽃피울 수 있다. 정권 재창출을 위해 DJ세력의 호남을 대변하는 역할이 있다고 본다. 대선은 총선과 달리 정체성과 이념의 통합"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열심히 방송하면서 문 대통령 성공을 돕고, 따끔한 지적도 하겠다. 또, 대북정책과 관련한 역할을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으로 본다"며 웃었다. 교착 상태에 빠진 남북 관계 상황에서 박 전 의원의 역할이 궁금해진다. '혹시 문 대통령이 임기 종료 전 남북정상회담을 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그는 "남북정상회담을 해서 북한과 미국을 이어주는 역할이 문 대통령에게 있다"고 주문했다.

마지막으로 최근 논란이 된 김홍업, 김홍걸 형제의 재산 갈등에 대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DJ와 이희호 여사가 서거할 때까지 모셨던 비서실장으로서 국민께 죄송하다. 두 아들이 잘 처리하기를 바랄 뿐이다"며 말을 아꼈다.

☞박지원 전 의원은 누구? 1942년 6월 5일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에서 출생, 1980년대 미국에서 고 김대중(DJ)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1992년 14대 민주당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DJ가 대통령 당선 후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 18~20대까지 전남 목포시를 지역구로 내리 3선했다. 그러나 이번 21대 총선에서 민주당 김원이 후보에게 패하며 낙선했다.

cuba20@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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