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대첩의 영웅' 이민성 용인시청 수석코치 <사진 - 문병희 기자> |
▶'도쿄대첩 영웅' 이민성 "꿈꿔왔던 역전골, 인생 바꿨다"…ⓛ편 다시보기
[유성현 기자] 이민성(38) 용인시청 수석코치에게는 '도쿄대첩'의 극적인 결승골이 비단 환희의 순간만은 아니었다. 선수 생활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 붙은 활약의 기준이자 부담의 연속이었다. 그는 도쿄대첩 이후의 축구 인생을 돌이켜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그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16강 좌절과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굴곡진 대표팀 역사를 두루 겪은 선수다. 하지만 수비수라는 포지션 특성상 승리의 주역으로 조명되기 보다는 패배의 아쉬움 속에서 실점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난의 화살을 받기 일쑤였다. 그때만큼은 도쿄대첩 맹활약의 추억이 오히려 쓰디쓴 독이 됐다. '과거 한 방에 의존하는 선수'라는 그늘 섞인 이미지가 짙게 드리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민성에게 태극마크의 의미는 남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선수 생활 최대의 목표였고, 끝내 월드컵이라는 꿈의 무대를 밟게 했던 자랑스러운 훈장이었다. 과거 대표팀에서 수많은 시련을 겪었던 그였기에 최근 한일전 0-3 참패의 악몽을 겪은 후배들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따뜻한 격려의 한마디에서 대표팀을 향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 "도쿄대첩 결승골, 차라리 안 넣었다면…"
▲ 이민성은 도쿄대첩 이후 유난히도 굴곡진 축구 인생을 돌아보며 그간의 마음고생을 털어놨다 |
- A매치에서 2골을 기록했는데, 그 중 하나가 도쿄대첩이었습니다. '이민성=도쿄대첩'이라는 평가가 좋지 않았던 적도 있었을 텐데요.
제 인생을 바꿔 놓은 게 그 골인데, 어떨 때는 '그 골을 안 넣고 그냥 선수생활을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을 했었어요. 평소 인터넷을 잘 안하는데, 가끔 저를 욕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거든요. '정말 못하는데 그 골 하나로 우려 먹는다'는 등의 말들이 가슴에 송곳을 꽂는 듯 했죠. 한때는 대표팀 은퇴에 대한 고민도 했었어요. '왜 내가 욕을 먹어야 되지?'라는 생각을 했죠.
- 수비수 포지션에서는 과거 영광의 기대감을 이어가기 힘들지 않았나요?
돌이켜보면 0-5로 패한 경기에는 거의 뛰었어요. 수비수니까 실점 장면에는 늘 화면에 잡혔죠. 사람들이 '쟤는 항상 골 먹는 장면에 나와', '한일전 골 하나로 대표팀에 뽑힌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럴 때마다 축구협회 관계자들한테 물어보고 싶었죠. 내가 대표팀 들어갈 실력이 정말 안 되냐고요. 제일 심했던 때는 2002년 한일월드컵 독일과 4강전이 끝나고서죠. 경기 후 '쟤는 왜 대표팀에 들어오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어요.
- 1998년 프랑스월드컵과 2002년 한일 월드컵 등 대표팀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했는데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16강 좌절을 돌이켜보면 그 결과가 당시 한국 축구의 현실이었어요. 우물 안 개구리였죠. 우리는 '같이 두 발 달린 선수인데'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지 전술 이해도나 조직력, 개인 기량이 세계적인 팀들과 판이하게 달랐어요. 그때 쓰디쓴 경험으로 한국 축구가 한층 성장했다고 봐요.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로 이어졌죠. 비록 부상에 시달린 후였기에 주역으로 활약하지는 못했지만 크게 낙심하지 않았어요.
- '4강 신화'를 일궈낸 23명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아쉬움은 없나요?
상관없어요. 저희 스스로 해낸 것이고, 그 영광의 일원이었다는 점이 중요했죠. 얼마나 자랑스러워요. 단, 독일 전 실점은 아쉬워요. 한 경기도 안 뛰다 그 경기에 뛰었는데 졌으니까요. 모든 책임이 나한테 오는 것 같았어요. 자신감이 없어져서 그 이후로 수비를 보기 싫었을 정도였죠. 이후 수비형 미드필더로 보직을 바꿨을 때는 얼마나 마음이 편했는지 몰라요. 그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어요.
◆ 최근 한일전 참패 "있을 수 있는 일…부담 떨치고 즐겨야"
▲ 이민성은 A매치 66경기를 소화하며 90년대 대표팀의 궂은 일을 도맡아 왔다 |
- 지난달 한일전 0-3 대패, 어떻게 보셨나요?
개인적인 기량이나 희생정신에서 일본이 많이 좋아졌다고 느꼈죠. 패스나 개인적인 기술은 일본이 조금 위에 있다고 생각해요. 한일 감정을 떠나서 철저히 축구만 봤을 때는 그래요. 일본 축구를 보면 세밀하고 재미있게 차잖아요. 반대로 스피드나 힘에서는 한국이 우위에 있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두 나라를 섞어 놓으면 굉장히 좋은 팀이 될 것 같아요.(웃음).
- 당시 후배 선수들의 구체적인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컨디션이 안 좋았고, 집중력도 부족했던 것 같아요. 어딘가 모르게 어두운 표정들이 있었죠. 0-3으로 진 건 어느 축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이거든요. 우리도 자신을 되돌아보고 다시 준비한다면 더 좋은 모습 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축구는 한 번 졌다고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음에 또 이기면 되죠. 한일전을 워낙 전쟁에 비유하지만 만나면 막상 칼 들고 싸울 것도 아니에요.(웃음) 선수들도 부담에서 벗어나 즐겼으면 좋겠어요.
- 현재 대표팀의 수비불안 문제는 어떻게 보시나요.
대표팀 수비는 로테이션 시스템이 갖춰져 있잖아요. 같은 팀에서 호흡을 맞춰온 사이라면 별 문제가 없어요. 수비는 조직력이라고 생각해요. 중앙 수비 같은 경우에는 한 번 결정하면 그대로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수비수 한 명이 상대팀의 공격 100%를 다 막을 수는 없죠. 일차적으로 수비수 윗선부터 단계적으로 잘 막아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수비수라도 좋은 활약을 하기 어렵죠. 실점을 수비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에요.
◆ 제2의 축구인생 "늘 노력했던 선수로 기억됐으면…"
▲ '도쿄대첩 영웅'보다 늘 노력했던 선수로 기억되길 바라는 이민성 |
- 용인시청 플레잉코치에서 올해 수석코치를 맡고 있는데, 지도자 수업의 어려움은 없나요?
처음에는 벤치에서 경기가 잘 안보이더라고요(웃음). 눈에 들어와야 하는데 선수 생활에 적응이 돼서 그랬나 봐요. 지금은 보면 알 수 있을 정도예요. 올해는 지차체가 다들 힘든 시기라 예산이 많이 줄었어요. 선수도 줄어 전국체전-도민체전 등 일주일에 5경기 넘게 치르는 경우도 많았고요. 팀 사정이 너무 안 좋으니까 나라도 뛰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해요. 그런데 선수 등록 기간이 지났네요.(웃음)
- 예상하는 감독 데뷔 시점과 특히 맡고 싶은 팀은 있나요?
더 고생을 해봐야죠. 물론 기회가 오면 해야겠죠. 시행착오는 있을 거라 생각해요. 실패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야죠. 국내보다는 외국에서 감독을 해보고 싶어요. 우리나라보다 좀 더 열악한 곳에서요. 선수 때 해외에 나가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죠. 유소년을 가르치면서 어학도 배우고, 또 하나의 재미있는 도전일 것 같아요. 나중에는 FC서울과 같은 빅 클럽에서 감독을 해보고 싶죠. 몇 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웃음)
- 장·단기 목표를 꼽자면요?
단기 목표라면 내년이 3년차니까 6강 목표를 이루고 내셔널리그에서 정점을 찍어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장기적인 목표라면 아까 말했듯 FC서울 감독이랄까요. 무엇보다 선수들 융화를 잘 하는 감독이 되고 싶어요. 선수들에게 계기를 마련해주고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감독이요. 롤 모델을 꼽자면 히딩크 감독님이나 귀네슈 감독님, 장외룡 감독님 등 여러 분들이죠. 세 분 모두 배울 점이 많아서 고루고루 잘 뽑아내야하는데 쉽지 않네요.(웃음)
- '도쿄대첩의 영웅'이라는 수식어 이외에 어떤 선수로 기억에 남고 싶나요?
팬들한테는 선수 생활 할 때 늘 노력했다는 선수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잘하고 못하는 걸 떠나서 열심히 했다는 그런 선수로 남는다면 저한테는 감사해요. 그런 의미에서 한일전 자료화면은 그만 끊어야 될 것 같아요. 자료를 어디다 버리던가 해야지.(웃음)
- 축구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과 인사 한 마디 전해주세요.
최근 대표팀이 한일전 0-3 완패로 비난 여론이 많은데요. 감독이라는 직업은 신이 아니죠. 모든 팀을 맨유나 바르셀로나처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해요. 갖춰진 상황에서 틀을 보고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K리그는 좋은 감독과 훌륭한 선수의 유입을 키워야 할 것 같아요. 내셔널리그도 지금의 상황은 열악하지만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팬들이 경기장을 찾아주셔야 축구계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승강제도 도입될 텐데 내셔널리그에 많은 애정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글 = 유성현 기자, 사진 = 문병희 기자>
더팩트 스포츠기획취재팀 기자 yshalex@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