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법' 몰리는 배임죄…'"엄격한 적용·관대한 양형"
입력: 2024.06.26 00:00 / 수정: 2024.06.26 00:00

''이사충실의무 확대'에 폐지론
"최후 보루로 남겨놔야" 반론도


재벌 오너 일가를 수사할 때 나오는 단골 혐의 배임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논란이 도마 위에 올랐다. 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았던 이재현 CJ그룹 회장, 이석채 전 KT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왼쪽부터) /더팩트 DB
재벌 오너 일가를 수사할 때 나오는 단골 혐의 '배임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논란이 도마 위에 올랐다. 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았던 이재현 CJ그룹 회장, 이석채 전 KT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왼쪽부터) /더팩트 DB

[더팩트ㅣ정채영 기자] 재벌 오너 일가를 수사할 때 나오는 단골 혐의 '배임죄' 폐지론이 도마 위에 올랐다. 기업 경영을 위축하는 악법이라는 지적이 있지만 법조계에서는 재벌의 영향력이 큰 현실에서 건강한 주식회사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 남겨놔야 한다는 반론도 강하다.

배임죄 폐지 논란은 제22대 국회에서 발의된 상법 일부개정 법률안에서 시작됐다. 주주에 대한 이사충실의무를 담은 상법 개정안이 화두로 떠오르자 지난 14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배임죄 폐지를 당근책으로 꺼내 들었다. 이 원장은 "삼라만상을 모두 처벌 대상으로 삼는 배임죄를 폐지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개정안은 상법상 기업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까지 확대하자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결국 주주 이익을 침해하는 경영 판단을 할 경우 이사에게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뜻으로 기존의 배임죄까지 더해져 이사들의 법적 책임이 더 무거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원장은 대신 배임죄를 없애자는 카드를 꺼낸 것으로 해석된다.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가 취득하도록 해 법인에 손해를 입히는 것'을 말한다. 개인이 만든 법인도 '타인'에 속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든 법인에 손해를 입히는 경우도 배임에 해당한다.

배임죄 폐지 논란은 하루아침에 나온 것은 아니다. 해외를 보면 미국과 영국은 배임죄 처벌규정이 없다. 위반 사항이 있다면 사기죄로 처벌하거나 개인 간 손해배상 등 민사로 해결한다. 독일은 형법상 일반 배임죄, 일본은 형법상 일반 배임죄와 회사법상 특별 배임죄 등이 있다. 반면 국내 법은 4가지의 배임죄가 있다. 형법상 배임죄, 업무상 배임죄, 상법상 특별배임죄, 5억이 넘는 범죄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죄까지 가중처벌도 가능하다. 이 때문에 한국만 배임죄가 너무 세다는 의견도 있다.

배임죄 폐지를 둘러싸고 재계와 법조계의 의견은 첨예하게 갈린다. 재계는 기업가 정신을 위축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폐지를 주장한다. 배임이란 윤리 문제로 볼 수도 있는 '배신'을 처벌하기 위한 규정이라며 민사로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을 내놓기도 한다.

반면 한국 재벌들의 사례로 배임죄 판결을 들여다보면 법원은 배임죄를 엄격하게 판단하고 양형도 관대하게 적용하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배임죄가 유지돼야 한다는 쪽의 대표적인 주장이다.

기업이 혈연으로 묶여있는 재벌 문화도 배임죄의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김태룡 변호사는 "사실상 개인이 사업체를 만들고 운영한다면 경영 판단할 때 배임죄 처벌에는 자유롭다. 그럼에도 주주들이 회사의 주인이 되는 법인을 만드는 건 세무적인 부분 등 혜택을 누리기 위한 선택"이라며 "그에 대한 책임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모든 계열사의 수장이 혈연으로 묶여 있는 재벌 문화가 남아 있다"며 "마지막 보루로서 배임죄는 남겨놔야 한다"고 말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19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금감원장-은행장 간담회를 마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정소양 기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19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금감원장-은행장 간담회'를 마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정소양 기자

이명박 정부 시절 이석채 KT 회장은 자신의 친척과 공동 설립한 기업 등 3개의 벤처기업 주식을 의도적으로 비싸게 사들여 회사에 100억 원이 넘는 손해를 끼친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1·2심 재판부는 이 전 회장의 배임 혐의를 무죄로 봤고, 대법원은 횡령 혐의마저 무죄로 파기환송 했다. 파기환송심 또한 무죄를 선고하면서 검찰은 상고를 포기했고, 사건은 이 전 회장이 형사보상금까지 받으며 마무리됐다.

배임죄 폐지를 꺼내 든 이 원장이 직접 기소했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최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1심 재판부는 이 회장의 업무상 배임 혐의를 포함한 모든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 주주에게 불리하게 산정돼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쳤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드물지만 배임 혐의로 중형이 선고되기도 한다. 2013년 이재현 CJ 회장은 1657억원의 횡령·배임·조세포탈 혐의로 기소됐고,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6개월과 벌금 252억원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장기간 다수의 임직원을 동원해 거액의 세금을 포탈해 조세정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일반 국민의 납세의식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개인적인 소비나 개인재산 증식을 위해 그룹 총수 지위를 이용해 저지른 업무상 횡령·배임 범죄도 비난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다만 범죄액수는 1657억원 중 366억원만 인정됐다.

이처럼 배임은 꽤 양형이 신중하다. 헌법재판소 또한 배임죄는 합헌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2015년 헌재는 신현규 전 토마토저축은행 회장과 채규철 전 도민저축은행 회장이 '배임죄는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에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당시 헌재는 이재현 회장과 이석채 전 회장의 판결에서 대법원이 이미 배임죄의 엄격한 해석 기준을 적용하고 있고 양형 문제는 입법자의 광범위한 입법재량 범위 안에서 판단하고 있다는 점을 합헌의 이유로 들었다.

헌법연구관 출신 한 변호사는 "기업은 항상 위험에 노출돼 있고,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기업을 위해 투자를 했다면 배임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배임죄가 처벌하려는 대상은 기업의 돈을 개인의 돈처럼 사용해 주식회사 제도를 악용하는 경우를 말한다. 실제로 실형이 선고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건전한 주식회사 제도를 위해서는 배임죄가 유지돼야 한다"고 밝혔다.

chaezero@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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