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5' 등 상급종합병원 곳곳 의료대란 조짐
'조속한 합의' 환자들 바람에도 대화 가능성 희박
의과대학 증원을 두고 정부와 의사 간 갈등이 장기화하면서 불편을 겪는 환자들이 늘고 있다. 병원을 떠난 전공의에 이어 의대 교수들마저 수술·진료 일정을 줄이거나 단축 근무를 실시하면서 의료대란 조짐마저 보인다. 조속한 합의를 요구하는 환자들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정부는 2000명 증원은 확고하다는 입장이라 양측의 대화 가능성도 희박한 상황이다. 1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의 한 종합병원에 환자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임영무 기자 |
[더팩트ㅣ김영봉·장혜승·조소현·황지향·이윤경 기자] # 원모(50) 씨는 약 6개월 전인 지난해 9월 담석증으로 인근 2차병원을 방문했다. 상급종합병원으로 가서 수술해야 한다는 의견에 원 씨는 곧바로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의료진은 다행히 당장 수술할 필요는 없으니 6개월 후 다시 보자고 했다. 그러나 지난 26일 6개월 만에 다시 서울대병원을 방문한 원 씨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들었다. 초음파검사와 피검사 결과 담석이 커졌지만 수술하려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 씨는 다시 수술 가능한 2차병원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분통을 터뜨렸다.
의과대학 증원을 두고 정부와 의사 간 갈등이 장기화하면서 불편을 겪는 환자들이 늘고 있다. 병원을 떠난 전공의에 이어 의대 교수들마저 수술·진료 일정을 줄이거나 단축 근무를 실시하면서 의료대란 조짐마저 보인다. 조속한 합의를 요구하는 환자들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정부와 의사들은 쟁점인 2000명 증원을 두고 '변경 불가'와 '재검토'로 평행선을 달려 양측 대화 가능성도 희박한 상황이다.
◆ "1년 기다렸다가 수술하거나 아니면 마음대로"
의대 교수들의 사직서 제출이 사흘째 이어진 27일 이른바 ‘빅5’를 비롯한 서울 주요 상급종합병원에서는 진료 차질로 불편을 겪는 환자들이 속출했다. 빅5를 수련병원으로 둔 서울대와 연세대, 성균관대, 가톨릭대, 울산대 의대 교수들은 모두 일괄 사직서 제출과 주 52시간 단축 근무에 동참한 상황이다. 원 씨처럼 수술이 무기한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환자도 잇따른다. 원 씨는 "아프지만 참고 기다려서 6개월 만에 가보니 담석이 꽉 찼는데도 당장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다"며 "암 환자 수술도 못 해주는 상황인데, 1년 있다가 수술할 거면 하고 아니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너무 기가 막히고 황당하다"고 토로했다.
권모(67) 씨는 발에 뼈가 자라는 증상으로 지난 14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 날짜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권 씨는 수술을 앞둔 사흘 전 병원으로부터 갑작스런 연락을 받았다. 수술이 취소됐다는 통보였다. 권 씨는 수소문 끝에 다른 병원에서 4월20일 수술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권 씨는 "작년부터 수술 예약을 했고 MRI도 찍고 4시간이나 기다려서 검사도 해서 수술만 하면 됐는데 갑자기 못한다고 연락이 왔다"며 "사람 목숨을 갖고 이러면 안 된다. 뼈가 자라는 수술이야 기다릴 수 있지만 암이나 그런 분들은 하루가 급한데 그러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의과대학 증원을 두고 정부와 의사 간 갈등이 장기화하면서 불편을 겪는 환자들이 늘고 있다. 병원을 떠난 전공의에 이어 의대 교수들마저 수술·진료 일정을 줄이거나 단축 근무를 실시하면서 의료대란 조짐마저 보인다. 조속한 합의를 요구하는 환자들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정부는 2000명 증원은 확고하다는 입장이라 양측의 대화 가능성도 희박한 상황이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들어서는 가운데 민주노총 서울대병원분회 조합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임영무 기자 |
80대 아버지 치료를 위해 충남 당진에서 올라와 서울성모병원을 찾은 50대 인모 씨는 호흡기내과를 방문했지만 빨라야 8월에야 진료가 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인 씨는 "우선 예약은 했는데 다른 병원 알아보고 가능하다고 하면 그쪽으로 하려고 한다"며 "의사 선생님 일정이 다 차서 그렇다는데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의사들도 고충이 있고, 정부도 고충이 있을 텐데 서로 합의하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환자 가족으로선 답답한 심정"이라고 하소연했다.
강북삼성병원에서 만난 최모(56) 씨도 지난 25일 예정됐던 감염내과 진료가 취소됐다고 전했다. 취소 이유는 듣지도 못했다고 했다. 최 씨는 "의사들, 정부 주장 다 타당성 있지만 시기적으로 정치적 요인이 맞물려 이렇게 된 것 같다"며 "선거 끝나면 합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환자들은 일제히 정부와 의사가 양보하고 합의할 것을 요구했다.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중인 유모(66) 씨는 "50일 넘게 입원하고 있는데 언제 파업할지 모르고 교수들 사직하면 치료를 못 받을 수도 있으니 걱정된다"며 "서러운 환자들 생명을 담보로 하는 건 아주 안 좋은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모(71) 씨는 "정부도 어쩌면 한 번도 합의를 보려고 하지 않냐"며 "지금 모든 게 마비된 것 같은데 서로 합의점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서울성모병원을 찾은 황모(79) 씨도 "사람 생명이 우선인데 정부가 잘못했더라도 의사들은 환자를 생각해줘야 할 것 같다"며 "급한 환자들 위험하지 않게 이제는 정부도 절충해서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의과대학 증원을 두고 정부와 의사 간 갈등이 장기화하면서 불편을 겪는 환자들이 늘고 있다. 병원을 떠난 전공의에 이어 의대 교수들마저 수술·진료 일정을 줄이거나 단축 근무를 실시하면서 의료대란 조짐마저 보인다. 조속한 합의를 요구하는 환자들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정부는 2000명 증원은 확고하다는 입장이라 양측의 대화 가능성도 희박한 상황이다. 사진은 서울성모병원 내부 모습./김영봉 기자 |
◆ 정부 "의료계, 대표단 구성해 대화 참여해달라"
환자들 바람과는 달리 정부와 의사는 이날도 팽팽한 입장차를 유지했다. 정부는 전공의와 의대 교수를 비롯해 대한의사협회(의협) 등 의사단체에 대표단을 구성해 대화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이날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에서 "의료계는 하나의 단일체가 아니다. 개원의도 있고 대학병원도 있다. 대학병원 안에도 교수님도 있고 전공의와 같은 봉직의도 있다. 여러 그룹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도록 충분히 대표단이 구성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 차관은 임현택 신임 의협 회장 당선인에게도 "정부와의 대화에 참여해 주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전공의 행정처분이 있을 경우 총파업에 나서겠다는 임 당선인 발언을 두고는 "'유연한 처분'을 계속 논의 중"이라면서도 "의사 집단이 법 위에 서겠다는 주장"이라고 경고했다. 의사들이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의대 2000명 증원 철회도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박 차관은 "정부는 모든 것을 (대화) 논제로 할 수 있다"면서도 "다만 2000명은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의사결정을 한 것이기 때문에 논의 과제로 할 때에는 합리적인 근거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의협도 2000명 증원 철회가 대화 전제조건이란 입장을 이어갔다. 의협 비상대책위원회는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2000명 증원의 과학적 근거가 없다"며 "일부 대학에서도 증원으로 수업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무리한 증원이었기 때문에 정부가 결자해지해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나서 문제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의협 비대위는 오는 31일 회의를 열고 임 당선인과 향후 운영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