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흐름 맞춰 '강제추행' 범위 확장
위안부 배상·베트남전 책임 모두 인정
계곡살인·신당역 사건 등엔 중형 확정
2023년 법원은 어느 때보다 다채로운 결과들을 내놨다./더팩트 DB |
[더팩트ㅣ정채영 기자] 김명수 대법원장, 유남석 헌법재판소장의 임기 마지막 해였던 2023년에는 특히 젠더·노동 분야에서 전향적 판결이 이어졌다. 강제동원, 위안부 피해자 등 역사적 문제를 놓고도 의미있는 판결이 나왔다. 사회적 충격을 준 흉악범죄 사건은 대부분 무기징역 등 중형으로 귀결됐지만 사형제 논쟁의 불도 지폈다. 2023년 주목받은 법원 판결과 헌법재판소 결정을 뒤돌아봤다.
◆ 성소수자 커플 '부부 권리' 인정…강제추행 범위 확대
지난 2월 성소수자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는 판결이 주목을 끌었다. 서울고법은 A 씨가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을 상대로 낸 보험료 부과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원고 패소 판결한 1심을 뒤집은 것이다. 재판부는 '성 소수자 부부가 가족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건보공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소수자 커플에게도 이성 부부와 같은 권리를 인정한 셈이다.
강제추행죄를 폭넓게 인정한 대법원 판결도 눈에 띄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9월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A 씨에게 벌금 1000만 원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강제추행죄는 폭행이나 협박이 '피해자가 항거하기 곤란할 정도'일 때 성립된다는 기존 판례를 깼다.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해 형법에서 폭행·협박이 인정되는 수준의 행위면 강제추행죄로 인정된다는 취지다.
◆일본 위안부 피해자 웃고 '베트남 민간인 학살' 정부 울고
역사적 문제는 특히 법원 판결에 민감하다. 국내를 넘어 외교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서울고법은 지난달 이용수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해자들에게 2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청구를 각하한 원심을 파기한 결과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주권국가는 다른 나라의 재판권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국가면제' 이론을 근거로 소송에 무대응해왔다. 1심은 이를 받아들여 피해자들의 청구를 기각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법정이 있는 국가의 국민에 대한 불법행위에는 국가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소송을 낸 이용수 할머니는 "하늘에 계신 할머니들을 내가 모시고 감사드린다"고 외쳤다. 이 판결은 일본이 상고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됐다. 다만 실제 손해배상 가능성은 낮다.
10년을 끈 '제국의 위안부' 논란도 사실상 일단락됐다. 대법원은 지난 10월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에게 벌금 10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무죄 취지로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학문적 표현은 형사처벌보다 토론과 검층으로 비판돼야 한다는 취지다. 박 교수는 위안부 피해자가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였거나 자발적 매춘이었던 측면이 있다는 내용을 기술해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를 받았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 정부의 양민 학살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도 나왔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2월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족 등이 낸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한국 정부가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정부는 '학살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재판부는 "명백한 불법 행위"라고 선을 그었다.
◆ 노란봉투법부터 중대재해법 1호까지 노동 이슈 주목
노동계에 유의미한 판결도 여럿이었다. 이른바 '노란봉투법(노조법 개정안)'의 입법 목적과 맞닿은 대법원 판단이 나왔고, 지난해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 관련 사건 첫 판결도 선고됐다.
대법원은 지난 6월 현대자동차가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소속 조합원 4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근로자의 민·형사상 면책 범위와 손해배상 청구 제한 범위를 대폭 넓히는 '노란봉투법'과 유사한 내용의 결론을 냈다. 불법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개인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때 각자의 불법 행위 정도 등을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다.
시행 2년을 앞둔 중대재해처벌법의 공은 법원으로 넘어왔다. 의정부지법은 지난 4월 중대재해처벌법 1호 선고에서 기업주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은 2호 판결에서는 창원지법 마산지원이 징역 1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법조계에 따르면 올해 중대재해법 관련 선고는 총 12건으로 집행유예 11건, 실형은 1건을 기록했다. 노동계에서는 솜방망이 판결이라고 비판하는 반면 재계는 처벌이 과도하다며 반발하고 있다. 두성산업 측이 창원지법에 신청한 중대재해처벌법 위헌법률심판제청 사건은 지난달 기각됐으나 위헌성 논란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중대재해법 제정의 계기가 된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고 김용균 씨 사망 사건은 원청업체 관계자 등에게 무죄가 최종 확정됐다. 이 사건으로 실형이 확정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지난 25일 대법원의 연장근로시간 관련 판결도 노사는 극명한 온도차를 보였다. 주 52시간 내면 밤샘근무도 가능하다는 취지의 판결에 노동계는 '노동지옥', 재계는 합리적 판단이라는 엇갈린 반응을 내놨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의 피의자 전주환이 지난해 9월 21일 오전 서울 중구 남대문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이동률 기자 |
◆부산 돌려차기·신당역 스토킹 살인 등에 중형…사형제 논쟁도
사회적 충격을 준 강력범죄 사범에 대한 판결도 이어졌다. 지난 9월 귀가하던 여성을 무차별하게 폭행한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고인에게는 징역 20년의 중형이 확정됐다. 이 사건은 항소심에서 살인 미수에서 강간살인 미수로 혐의가 변경돼 형량이 8년이나 늘었다. 여전히 피해자는 신변 불안을 호소하고 있다.
남편을 계곡에서 뛰어내리도록 강요해 숨지게 한 이른바 계곡 살인 사건 재판도 막을 내렸다. 지난 9월 주범 이은해에게는 무기징역, 공범 이현수에게는 징역 30년이 확정됐다. 다만 재판의 쟁점이었던 심리적 지배. 일명 '가스라이팅'은 인정되지 않았다. 이후 이은해는 남편의 보험금을 달라는 소송도 냈으나 모두 패소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피고인 전주환과 신변보호를 받던 여성을 찾아가 가족을 살해한 이석준 또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공통적으로 사람의 생명, 가치를 영원히 박탈하는 사형은 매우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며 "피고인의 생명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아직 재판 중인 신림동 칼부림 사건 등 사회적 공분을 산 강력범죄가 속출하면서 사형제 폐지 논쟁도 뜨거워지고 있다.
◆헌재 "검수완박, 권한침해 있지만 가결은 문제 없다"
문재인 정부 '검찰개혁'의 마침표였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권한쟁의심판 사건 결정은 '기각'으로 결론났다. 헌재는 법사위원장의 회의 진행에 따른 국민의힘 의원들의 권한 침해는 인정했지만 국회의장의 개정법률 가결 선포 행위는 문제없다고 봤다. 다만 재판관 5대4 의견으로 팽팽했다.
인공지능(AI)의 특허권 인정 문제는 전세계적 관심사다. 국내에서도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6월 인공지능 개발자 스티븐 테일러가 특허출원을 무효처분한 특허청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낸 행정소송에서 원고 패소판결했다. 테일러는 특허출원 성명란에 본인이 아닌 자신의 인공지능 이름 '다부스'를 기재했는데, 국내 특허법은 '자연인'만 발명자로 인정하고 있다. 재판부는 현행법상 "AI는 물건에 해당할 가능성이 커 독자적 권리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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