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판검사·노동부에만 허용된 핵심자료
확정 판결 한해 검찰 찾아가 열람만 가능
미국·영국 등은 정부기관 홈페이지 공개
2019년 10월 부산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추락해 숨진 정순규 씨의 아들 석채 씨와 딸 예림 씨./주현웅 기자 |
대한민국 일터가 위험하다. 한국의 사망만인율(노동자 1만명당 산재사고 사망자 수)은 8년째 0.4~0.5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4위다. 평균치(0.29)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산업재해율 역시 2018년 0.54%, 2019년 0.58%, 2020년 0.57%, 2021년 0.63%로 감소하기는커녕 상승 추세다.
정부는 현행 주 52시간 근로제를 유연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해 사후 규제·처벌 중심에서 자율 예방체계로 전환한다. 변화가 없는 산업재해 실태를 두고 자율성을 강조한 ‘노동개혁’으로 방향을 틀었다.
바뀌지 않는다는 현장은 어떤 모습일까. 노동자들은 왜 다치고, 기업은 어떻게 대처하며, 정부는 무슨 노력을 해왔을까. <더팩트>는 근본적인 이유를 현장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산업재해가 빈발한다는 현장으로 직접 갔다.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관련 400여건의 판결문도 분석했다. 왜 ‘목장갑 인생’들은 오늘도 다치고 죽을 수밖에 없는지 7회에 걸쳐 그 잠정적인 결론을 공개한다. 5회는 산업재해 진실 규명에서 중요한 자료로 꼽히는 '산재조사표'에 얽힌 비밀주의를 파고들어 본다. <편집자주>
[더팩트ㅣ주현웅·김이현 기자] 2019년 10월 부산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추락해 숨진 고 정순규 씨의 아들 정석채 씨, 2021년 4월 평택항에서 컨테이너 사고로 숨진 고 이선호 씨의 아버지 이재훈 씨는 여전히 눈물로 세상과 싸우고 있다. 각각 경동건설과 동방 등 원·하청 직원들이 법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민사소송과 항소심 등으로 법정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두 유족에게는 또 같은 아픔이 있다. 사건이 공론화하기 전까지 정부가 사고를 어떻게 조사했는지 알지 못했다. 중대재해 사건이 벌어지면 고용노동부의 ‘산업안전 감독관’ 등은 현장에 방문해 조사를 진행하고 '재해조사 의견서'를 작성한다. 하지만 피해자와 유족에게는 내용이 공개되지 않는다. 기업이 작성하는 ‘산업재해 조사표’도 접근이 어렵긴 마찬가지다.
◆유족은 애타지만 '주요 수사자료' 이유로 비공개
재해조사 의견서는 사고의 경위와 원인 규명을 위해 작성한다. 유사 사고의 재발을 막는 데 중요하게 쓰일 수 있다. 몇년째 투명히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가 계속되지만 고용노동부는 완고하다. 사업주의 기소 여부를 좌우할 수 있는 '주요 수사자료'라며 공개를 꺼린다. 판검사와 정부만 볼 수 있는 셈이다.
민주노동연구원은 최근 '중대재해 조사 관련 정보의 공개 실태와 해외 사례 분석' 보고서를 내고 이 문제를 지적했다. 연구원은 노동부에 17건의 산업·중대재해 관련 정보공개를 청구했으나 한 건도 받지 못했다. 노동부가 숨긴 자료를 오히려 검찰이 '확정된 형사재판 사건 2건에 한해 직접 검찰청을 방문해 열람하라'고 안내했다.
고 이선호 씨 아버지인 이 씨는 해당 자료를 간신히 확보했다. 노동부에서 수차례 공개를 거부당하다 재판 과정에서 수사기록을 살핀 변호사의 도움으로 얻을 수 있었다. 경동건설 중대재해 사건 유족인 정 씨도 노동부에서 1년여간 수차례 비공개 통보를 받은 뒤 가까스로 손에 넣었다. 국정감사와 언론보도 등이 잇따른 뒤 국회의원실을 통해서다.
해외였다면 이 씨와 정 씨는 마음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영국의 경우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 산재가 발생하면 모든 사업장의 이름을 포함한 구체적 정보와 재해 주요 내용 및 처벌 사항 등을 밝힌다. 영국은 우리나라 중대재해법의 모델이 된 국가이기도 하다.
미국도 노동부 산하 안전보건청 홈페이지에 관련 정보를 게시한다. 사고 발생 업체 이름은 물론 사고 원인과 유형, 노동조합 유무까지 공개한다. 특히 연방 산업안전보건연구소(NIOSH)는 사망 재해를 분석해 예방 대책 등을 담은 심층 분석 보고서를 낸다. 호주와 캐나다 역시 범위나 분량 차이는 있으나 한국보다 훨씬 폭넓게 공개한다.
◆근로자도 모르는 근로자 대표가 서명
산업재해 조사표도 두 유족에게는 상처였다. 이 표는 산업·중대 재해가 발생하면 기업에서 작성해 노동부와 지방노동청에 내는 자료다. 산재 은폐를 막고자 기업에 기록과 제출을 의무화했다. 모든 사고 현장을 직접 점검할 수 없는 노동부에게는 중요한 서류다. 기업 행정처분의 적용 기준이 될 수도, 수사나 재판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정 씨는 이 표도 1년여 싸움 끝에 확인했다. 지방노동청이 '경동건설 요청'이라며 자료를 비공개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권과 언론 등이 1년여 동안 압박한 끝에 가까스로 그의 손으로 들어왔다.
문제는 이 표도 부정확하다는 점이다. 아버지 정씨가 2m짜리 사다리에서 추락했다고 적혀 있었다. 높고 위험한 철제물이 아닌, 낮은 수직 사다리를 내려오다 사고가 났다는 식이었다. 사업주와 함께 서명한 근로자 대표란에는 사고 당시 현장소장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아버지의 과실이 아니라면 부실한 관리·감독 책임을 져야 할 인물이었다.
경찰 등의 수사 결과에선 사다리 높이가 3.8~4.2m였다. 하지만 산재보고서에 2m라고 쓰인 탓에 법정에선 사다리 높이를 놓고 소모적인 논쟁을 벌여야 했다. 법원은 '사측 주장과 달리 2m는 최소한 넘는다'고 봤다. 단 항소심 재판부는 경동건설과 하청업체의 현장소장 2명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원심을 유지했다.
정 씨는 <더팩트>와 인터뷰에서 "산재조사표가 기업 입장만 반영한다는 건 노동재해 피해자들의 공통된 인식"이라며 "노동청이 공개를 계속 꺼렸을 땐 국가를 향한 배신감마저 들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이런 산재조사표라면 차라리 없애버렸으면 좋겠다"고 비판했다.
산재조사표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피해자도 적지 않다. 기업은 의무사항이라 잘 알고 있지만, 피해자는 확인조차 어려워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기업의 축소·허위 작성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2021년 4월 평택항 부두에서 청소 작업 중 개방형 컨테이너에 깔려 숨진 고 이선호 씨의 아버지 이재호 씨도 그랬다. 그는 <더팩트> 취재 과정에서 산재조사표를 처음 알게 돼 현재 지방노동청에 공개를 청구한 상태다. 자료는 아직 받지 못했으나 원청인 동방 소속 강모 씨가 근로자 대표로 서명한 사실까지는 확인했다.
이 씨는 "내가 평택항에서 동방과 함께 약 10년을 작업반장으로 일했지만, 강모 씨는 처음 듣는 이름"이라며 "저와 아들은 모두 일용직이었는데, 그가 무슨 자격으로 근로자 대표로 사인을 했냐"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일하는 동안 직원으로 인정도 안 해줬으면서, 산재조사표 쓸 땐 동방 직원이 우리의 근로자 대표가 될 수 있는 것인가"라며 "평소에도, 사고 당시에도 현장에 없던 사람이 산재조사표를 어떻게 쓸 수 있었는지도 묻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21년 4월 평택항에서 컨테이너 사고로 숨진 고 이선호 씨의 아버지 이재훈 씨. |
◆허위·축소 작성해도 '고의성 입증' 어려워
기업에 유리한 산재조사표의 양식 자체도 이런 상황을 부추긴다. 표는 '재해 발생 당시 상황', '재해 발생 원인' 등을 간략히 쓰게 돼 있다. 사고의 구조적 배경보단 그에 이르게 된 단편적인 상황을 적는 식이다. 피해자의 사고 직전 동선이나 행위를 중심으로 작성하도록 해 개인과실을 부각할 우려도 있다.
특히 이 표도 피해 당사자와 유족은 관여할 수 없다. '사업주'와 '근로자 대표'가 각각 서명해 완성한다. 근로자 대표는 사업주가 정한다. 이에 근로자들도 모르는 근로자 대표가 참여하기도 한다. 양쪽이 말을 맞추면 사건을 축소할 가능성도 있다.
산재조사표가 허위로 작성돼도 처벌이 쉽지 않다는 게 더욱 큰 문제다. 표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허위를 검증할 방법도 없지만, 발견하더라도 고의성을 따지기 어려워서다. 이같은 허위 산재조사표는 정부의 행정처분을 낮출 수도 있다. 이 씨와 정 씨 사례처럼 적절한 수사나 재판을 방해하기도 한다.
박사영 노무사(한국노무사회 부회장)는 "법인에 자문하는 노무사 중 일부가 기업 요구에 따라 산재조사표 축소 작성을 돕는 일탈 행위는 오래전부터 풀어야 할 숙제였다"며 "산재조사표를 대외에 공개하거나, 사측과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 노무사라도 적정 작성 여부를 검증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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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s@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