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원전 첫 유죄 부른 '추상적 위험범'…백운규 영향은 '글쎄'
입력: 2023.01.15 00:00 / 수정: 2023.01.15 00:00

'감사 방해 결과 없었다' 주장했지만 배척
실제 방해 결과 발생안해도 처벌 가능해
혐의 다른 백운규 재판 영향은 미미할 듯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이 지난해 6월 서울동부지법에서 열리는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남용희 기자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이 지난해 6월 서울동부지법에서 열리는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남용희 기자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 사건에서 첫 기소된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이 1심에서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들은 감사가 실제로 방해받지 않았다고 항변했지만, 재판부는 감사방해죄는 '추상적 위험범'으로, 감사 방해라는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감사원이 제출을 요구한 자료를 삭제한 것만으로도 범죄가 성립된다고 판시했다. 다만 이 사건으로 같은 재판부 심리로 1심이 진행 중인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 재판에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불필요 자료 정리" "인수인계 과정" 주장 배척 왜?

이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산업부 국장 A 씨, 과장 B 씨, 서기관 C 씨는 청와대가 원전 조기 폐쇄에 개입한 사실을 숨기려고 감사원 감사를 앞두고 관련 자료를 삭제한 혐의를 받았다. 이에 대해 최상급자인 A 씨 측은 중간본 등 불필요하거나 부정확한 자료를 정리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전지법 형사11부(박헌행 부장판사)의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국회가 감사원에 감사를 요구한 조기 폐쇄 결정의 타당성 여부는 조기 폐쇄 및 즉시가동중단 결정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살펴봐야만 알 수 있다"며 "산업부가 청와대 등과 협의하거나 보고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자료가 반드시 필요하고, 그 자료에는 중간본이나 수정본 등도 포함된다는 걸 A 씨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며 배척했다. 감사원은 최초로 자료 제출을 요구한 후 산업부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거듭 공문을 보내 '최근 내부 보고 자료, BH 혐의 및 보고자료 일체'를 제출하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B 씨 측은 후임자가 중간보고 자료를 최종 의사결정 자료로 오인할 수 있으니 C 씨에게 인수인계를 지시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인수인계 지시는 2018년 6월경, A 씨의 자료 정리 지시를 하달한 건 2019년 11월이라는 시기에 주목했다. 인수인계 지시를 한 지 1년 5개월이 지난 시점에 또 관련 지시를 한 건 상식적이지 않다고 봤다. 이밖에도 B 씨가 '이메일, 휴대전화, 클라우드 자료도 삭제하라'라고 지시한 점에 비춰, 통상의 인수인계 지시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C 씨 측은 인수인계 과정에서 자료 외부 유출을 막으려 자료를 삭제했다고 주장했지만, 삭제 방법에 발목이 잡혔다. 재판부는 "산업부는 민감한 업무 정보의 외부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내부 보안지침에 따라 정보처리 담당부서에서 하드디스크를 폐기하는 공식적인 방법으로 자료를 영구 삭제하고 있다"며 "C 씨는 이 방법과는 딴판으로 감사원이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일요일 밤에 자신의 사무실도 아닌 곳에 들어가 관련 자료를 대량 삭제했다. 유출 방지를 위해 자료를 삭제했다고 볼 수는 없다"라고 지적했다.

감사원의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타당성 관련 감사 결과가 공개된 2020년 10월 경주시 양남면 월성원자력발전소에 운전이 영구정지된 월성 1호기가 보이고 있다. /뉴시스
감사원의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타당성 관련 감사 결과가 공개된 2020년 10월 경주시 양남면 월성원자력발전소에 운전이 영구정지된 월성 1호기가 보이고 있다. /뉴시스

◆공무집행방해죄 판례로 감사방해죄 해석한 재판부

이 재판의 또 다른 쟁점은 감사원의 감사가 실제로 방해됐는지였다. A 씨 등은 "피고인들이 감사원이 요구하는 자료 중 일부만을 제출하거나 관련 자료를 삭제했더라도 감사원의 면담 조사 과정에서 USB에 저장된 관련 자료를 모두 제출하는 등으로 감사원의 감사에 적극적으로 임했다"며 "감사원은 감사를 통해 산업부가 원전 가동 중단 결정에 개입했는지 여부를 파악함으로써 감사의 목적을 달성했다"라고 주장했다. 피고인들의 행위로 감사가 방해되지 않았다는 취지다.

실제로 감사원은 감사를 거쳐 2020년 10월 원전 조기 폐쇄의 핵심 근거였던 경제성 저평가에 산업부가 개입했고, 산업부의 감사 방해 행위가 있었다는 정황을 확인해 발표했다. 하지만 법원은 '추상적 위험범'이라는 법리를 들어 감사 방해 행위의 결과가 발생하지 않아도 처벌할 수 있다고 봤다. 감사방해죄와 구성요건이 유사한 공무집행방해죄 등이 방해 결과 발생을 성립 요건으로 두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례가 근거였다. 재판부는 "업무방해죄 등이 감사방해죄의 보호법익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했다. 또 감사방해죄를 추상적 위험범으로 보지 않을 경우, 감사원이 방해 행위에도 적극적인 노력으로 감사를 한 경우 방해 행위자를 처벌할 수 없는 불합리한 결과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재판부는 "고의적인 행위로 감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한 때, 또는 그 같은 행위로 감사원의 감사를 곤란하게 해 감사를 부당하게 지연시킨 때에도 감사방해의 결과가 발생한 것으로 봐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백운규 재판 영향은 없을 듯… 직권남용 전합 판례도 쟁점

원전 논란의 첫 기소건이 유죄로 결론 나면서 같은 재판부 심리로 1심 재판을 받고 있는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의 재판 향방에도 관심이 쏠린다. 두 사건 모두 원전 조기 폐쇄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혐의 사실도 달라 이번 판결이 백 전 장관 재판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는 것이 법조계 중론이다. 서초동의 한 중견 변호사는 "산업부 공무원의 혐의는 감사원 감사를 앞두고 자료를 인멸했다는 것이고, 백 전 장관의 혐의는 원전 조기 폐쇄가 한국수력원자력에 손해를 입힐 걸 알면서도 경제성 평가를 조작해 폐쇄를 강행했다는 것"이라며 "공소사실상 범죄 행위와 죄명도 각각 달라 백 전 장관 재판과는 무관하다고 봐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백 전 장관은 원전 즉시 가동 중단 의향을 담은 보고서를 받은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번 판결에서 백 전 장관이 이사회 허가 아래 원전 가동을 중단하겠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무르고, 즉시 가동 중단하겠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새로 받은 사실이 인정됐지만 아직 다툴 부분이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직권남용죄 인정 범위를 좁혔다. 전합은 2020년 1월 상관 지시를 따라야 하는 공무원이 한 행위를 '의무 없는 일'로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판시 사항이 백 전 장관 사건에도 상당 부분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내다봤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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